두부 한 모에 담긴 슬픈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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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주간은 입동 추위로 인해 날씨가 조금 추웠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언론에서는 비록 한파 추위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내 고향에 비하면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거든요. 하기에 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추위이건만 그래도 이곳 한국생활 10년이 지나면서 저도 조금은 추위를 타게 되었나 봅니다. 지난 한 주 조금은 추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쌀쌀한 날씨에는 뜨끈한 두부가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온 식구가 모두 쉬는 주말이라 올 여름 제가 직접 심고 가꾼 콩을 미지근한 물에 담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리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먹기는 조금 아깝다고들 말하지만 저는 내 가족을 위해 서라면 뭐든 아깝지가 않았거니와 오랜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지나간 제 솜씨를 발휘해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막상 두부를 만들어 가족들에게 대접해 보겠다는 심정으로 콩을 담그고 보니 서슬(간수)이 없었습니다. 워낙 일을 저지르고 보는 급한 성격 때문에 때로는 많은 생각을 해보지 않고 일을 덜컥 시작하는 성미이지만 또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저는 동네 두부가게로 달려갔습니다.

가게 주인은 친절하게 나의 얘기를 들어 보더니 크게 웃으시며 서슬(간수)을 조금 주었습니다. 정말 감사 하고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또 한명의 귀한 분을 알게 됐다는 게 저에게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한 번 신세지려면 크게 지라는 말이 있듯이 저는 늦은 오후에 퉁퉁 부른 콩을 들고 두부 가게에 들려 콩을 갈아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솥에 끓였습니다. 결국 두부를 다 만들었는데 두부모를 자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저는 대충 주방 칼을 손에 들고 두부모를 자르기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습니다. 떨리는 제 손 놀림을 지켜보던 아들이 한마디 합니다. “우리 엄마도 이젠 나이가 들었네, 그전에는 척척 두려움이 없이 예쁘게 잘 했었는데”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순간 저는 지나간 옛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내 고향 평양에도 식량 공급이 갑자기 끊기고 고난의 행군시기 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남들 다 자는 새벽에 일어나 두부를 만들어 가내 반에 내다 팔고 두부 짠 비지로 식구들의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자식들에게 더 좋은 것을 먹이고 싶고 더 좋은 것을 입히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 하는 우리 부모들의 마음은 이곳 한국이나 북한이나 꼭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려운 시절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도 먹고 싶어 하는 두부였건만 두부 한모 제대로 먹이지 못했습니다. 두부 자르다가 잠시 잠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또 한마디 합니다. “어린 시절 에는 두부 모서리 한 조각이 별맛이었는데.” 당시 12살이었던 개구쟁이 아들은 아침 새벽이면 잠에서 일어나 두부를 만드는 제 곁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콩 2kg으로 두부를 만들면 총 24모가 나오거든요. 24모 두부를 자르면 모서리가 조금 떨어지면 아들은 그 모서리를 먹곤 했습니다. 두부 모서리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아들은 항상 꼭 같은 말을 했습니다. “두부 짠 비지는 깔깔해 목구멍으로 넘어 가지 않는다”는 아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제 가슴은 짠했거든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두부를 다 만들어 놓고 바쁜 시간으로 가내 반에 넘기지 못하고 동사무소에 출근했다 집에 오면 때로는 두부 한 개가 없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두부모가 작아지기도 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콩 두부도 우리 아이들에게 마음대로 먹일 수가 없었던 그 시절을 생각 하면 지금도 마음이 짠하고 뭔가 울컥 해 마음이 아픕니다.

딸들이 한마디 또 합니다. 정말 철이 없었던 그 시절엔 고생 하는 안쓰러운 엄마생각보다도 돈돈 하면서 아깝다고 두부 한 모 안주는 엄마가 너무도 서운했다고 고백합니다. 작은 딸이 집단 체조로 인해 조금 힘들었던 시절 엄마가 동생과 언니 몰래 뜨끈한 두부에 빨간 양념장을 쳐서 주었는데 정말 별맛이었다는 말을 하자 큰 딸은 웃으며 같은 자식이었는데도 짝을 놓았구나 하는 말을 덧 붙였습니다.

어려운 시절 우리 부모들에게는 누구나 다 이런 아픈 사연이 있었건만 괜스레 오래전 짠한 얘기에 제 눈에 눈시울이 맺히기도 했습니다. 큰 사위는 왜 이 좋은 시간에 그런 말을 했느냐하면서 아내를 추궁하기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딸은 괜히 웃자고 한 얘기였다고 한마디 했습니다.

저는 밥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내내 행복해 하는 내 가족을 바라보며 잠시 잠깐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님이 생각났습니다. 항상 입동 추위가 닥쳐오면 추위에는 두부가 입맛을 돋운다고 하시면서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 언제나 콩을 맷돌에 갈아 자주 두부를 해 주셨거든요. 이렇게 두부 한모를 두고도 지나간 가슴 아팠던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아픈 추억이 나와 또 내 가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탈북자들에게는 누구나 있었던 사연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도 북녘땅 내 고향의 주민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