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렸습니다. 첫눈의 양은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제가 살고 있는 파주에는 정말 많은 눈이 내려 소복이 쌓였습니다. 퐁퐁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어느새 벌판에 하얗게 쌓였고 전 손전화기를 꺼내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날렸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들도 역시 재빠르게 사진을 찍어 보내 왔습니다.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서울과 부산, 포항, 그리고 평택, 서산, 부천에서도 눈 내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손전화기를 통해 연속으로 날아옵니다. 눈이 오면 집 강아지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옛말도 있듯이 저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마치 어린아이들마냥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었습니다. 입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의 기운을 느끼는 동시에 벌판이 떠나갈 듯이 크게 웃고 떠들었습니다. 철없이 놀고 있는 저를 한참 바라보던 남편은 어이없는 웃음을 짓기도 합니다만 그도 괜스레 행복한 웃음을 지어주었습니다.
저는 즐거운 마음 그대로 늦은 오후,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감자탕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탈북자 모임을 함께하는 회원들과 저녁 식사 약속이 되어 있었거든요. 여러 명의 회원들 중에는 처음 보는 친구 2명도 있었습니다. 함북도 무산이 고향인 남자 회원은 한국에 온지 5년이 되었고 다른 곳에서 살다가 회사 일로 인해 이곳 파주에 이사 온지 겨우 4개월 되었으며, 다른 여자 회원은 한국에 온지 10년차 북한에서의 고향은 새별이라고 하네요.
저에게는 첫 만남이었지만 오랜 사이 맺어진 친구처럼 또한 친척처럼 매우 반가웠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의 첫 만남에는 서로 나누는 첫 인사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원 몇기 생이냐고 물어보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제가 나이도 많지만도 하나원에선 제일 고참이기도 했습니다.
무산이 고향인 그 친구는 5살된 딸애가 있었습니다. 그는 딸애를 위해 열심히 산다고 합니다. 나름대로의 아픔과 상처는 있지만 밝은 모습으로 자녀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제가 보기에도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5년 전만 해도 북한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 배고픔과 어려운 생활고는 끝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 한국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내 것이 생기고 모으면 모을수록 차곡차곡 채워지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하네요. 비록 홀몸으로 어린 딸애를 키우느라 조금은 어렵지만 아빠라는 단어가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역시 고향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려울 때는 이 왕누이와 우리 회원들이 있으니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달라”고 부탁도 했습니다.
서로 서로 고향에서 있었던 아픔과 이곳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들 그리고 고향의 소식과 지금 행복한 새 삶에 대해 아낌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습니다. 노력하면서 열심히들 살고 있는 당당한 모습과 함께 있을 때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회원들의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은 든든하면서도 대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이곳 한국으로 온 우리 탈북자들은 정말 선택된 사람들이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귀중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됐습니다.
고향이 함북도라는 그 친구는 비록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들고 했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 누구도 치유해 줄 수 없을 만큼 엄청 컸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돌도 안된 그 어린 딸애를 배낭에 넣어 등에 지고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차디찬 두만강 물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부터 그는 성공이면 살고 성공을 못하면 공개 총살 된다는 비장한 각오가 생겼으며 말 모르는 중국 땅에서 뜻하지 않게 천주교를 찾아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 애는 5살이 되었고 어린이집에서 주말에만 아빠를 찾아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당당하고 밝은 모습으로 딸애를 키우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인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첫 눈을 맞으면 그 해 많은 복이 차려 진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첫 눈이 내리는 날 많은 회원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더불어 그들과 함께 먹은 감자탕 역시 특별한 메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