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렸습니다. 언제 포근했던 가을이 있었나 할 겨를도 없이 올 겨울 첫 추위 신고식을 제대로 하는 갑자기 찾아온 추위였습니다. 첫눈치고는 함박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눈바람이라 더더욱 춥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온도가 갑자기 영하로 떨어짐과 함께 내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저 역시 그 중 한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남편과 함께 아들 집에 갔습니다. 아들의 퇴근시간에 맞춰 가느라 했지만 조금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조금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아들집에 들어섰습니다. 현관 비밀번호 그리고 층 비밀번호와 집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누르고 방안에 들어섰습니다. 잠깐 쉬고 있는데 아들이 도착하고 대학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며느리도 조금 늦어 도착했습니다.
옷도 바꿔 입기 전에 아들 며느리를 데리고 우리 부부는 신세계백화점으로 갔습니다. 원래 백화점을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조금은 불만이 있었지만 잔소리 하지 않고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데는 눈길을 두지 않고 곧장 내의 가게로 갔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부부에게 내의를 선물하기 위해서 이미 아들과 약속이 돼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며느리가 골라 주는 내의가 디자인은 물론 색깔 좋고 또 질과 촉감도 좋아 첫눈에 오케이 했습니다. 며느리는 4년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에 입사를 하고 어느새 3개월 신입사원을 마치고 정직원이 되어 기본 첫 월급을 탔다고 합니다. 첫 월급 기념으로 내의를 선물로 구입해 주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저는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작은 박스를 뜯어 내의를 입었습니다. 어쩌면 마치 제 몸을 재서 만든 내의같이 몸에 딱 붙었고 편했습니다. 순간 왠지 마음이 조금 울컥함과 함께 마음이 포근해 오는 며느리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며느리의 작은 두 손을 잡았습니다. 처음 잡아 보는 며느리의 작은 손이었지만 그리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며느리는 북에 있을 때 한창 부모의 품 안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공부해야 할 9살 나이에 엄마와 언니들이 강을 건너 떠나고 나이 많은 할머니와 함께 그 작은 손으로 빵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아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야말로 소녀가장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그 많은 고생과 설움 속에서 너무도 일찍 철이 들었습니다. 먼저 중국으로 탈북한 엄마와 언니들과 소식이 닿아 중국으로 가게 됐고 어린 나이에 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하며 이곳 한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검정고시를 거쳐 간호대학을 졸업했고 또 졸업하자마자 높은 성적으로 그 대학 병원에 배치를 받게 됐습니다. 아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뭔가 무거웠던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정말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복이 많고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남들이 가질 수 없는 부자, 누구든지 맘대로 가질 수 없는 부자이거든요. 아들, 며느리, 딸, 사위 그리고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은 금쪽같은 내 손자 녀석들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이 세상 무서운 것 없는 정말 저는 큰 부자입니다. 친구들은 늘 저에게 너무도 복에 겨운 투정과 고민을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저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해 봅니다만 만약 내가 지금도 고향에 살고 있다면 이런 행복한 걱정, 복에 겨운 투정타령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살아 있기나 할까, 아마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해 봅니다. 사실 하루 한 끼 보내면 다음 끼 이어갈 근심 걱정으로 한 순간도 편안한 시간이 없고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살아왔습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식량이 부족하다보니 땔감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다 부족하고 어려웠거든요. 때로는 앞이 캄캄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중국으로 간 딸을 찾아 말 모르는 중국 땅에서 정처 없이 보낸 허송세월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제 북송되어 짐승보다도 못한 멸시와 구박을 견디다 못해 제 나이에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눈이 번쩍 틔어 이곳 한국으로 오게 됐고 이곳 한국에 와서도 자식들을 적응시키는 데 온 심혈을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의 행복과 보람을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집 애들보다 비록 좋은 대학은 안 나왔어도 너무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그리고 쥐구멍에도 해뜰날이 있다는 속담이 있듯이 바로 나에게 이런 행복이 찾아오려고 그런 고생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올 겨울은 예년에 없는 추위와 함께 눈도 많이 내린다고 하네요. 하지만 며느리가 구입해준 내의를 입으면 나에게는 그 어떤 강추위도 없을 것이고 포근한 겨울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