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강원도 춘천으로 겨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봄과 가을을 탄다고들 합니다만 저는 왠지 겨울을 타는 것 같네요. 뜬금없이 친구에게서 어딘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저희는 전철을 타고 강원도 춘천역으로 갔습니다. 그야말로 계획도 없고 뜬금없는 여행이었습니다.
춘천역에 도착해 망설임없이 커피숍으로 들어갔습니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커피숍 역시 조용했습니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놓고 마음을 녹이며 목적지를 지정하고 있는데 마침 함박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눈이 오면 강아지들이 좋아한다고들 하지만 저희도 마냥 즐겁고 좋았습니다. 춘천에 살고 있는 친구를 기다리느라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기다리는 친구는 오지 않고 배꼽시계는 이미 배고픔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춘천하면 유명한 닭갈비에 막국수가 있거든요. 배고픔을 달래며 50년 전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막국수 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막국수에 메밀전을 시켰습니다. 소화도 시킬 겸 춘천 시가지를 걸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마침 춘천 장날이었습니다. 장마당의 범위가 얼마나 넓고 큰지 한 바퀴 돌고 보니 한 20리 는 걸은 듯 했습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갔네요. 시장 안에 있는 음식점 하나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친구와 함께 무작정 들어가 도루묵 전골을 시키고 이면수 구이를 시켰습니다. 음식을 가져다주며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할머니 한 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마치 어머니 생각이 났고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한국에 와서는 시장이나 길거리 음식은 별로 안 좋아 했거든요. 시장을 보기 위해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 구경을 하며 마시는 소주가 별맛이었습니다. 흘러간 옛날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고난이 행군이 시작되면서 평양시에도 식량 공급이 끊어지고 주민들의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거든요. 특히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의 고통이 더욱 컸습니다. 주민들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가 아니라 “아침은 먹었어요” 하는 인사말로 바뀌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인민반 주민들의 가정 방문과 동시에 밥 가마뚜껑을 열어 보는 것이 인민반장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기도 마무리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어르신 두 분이 살고 있는 집에 들어섰을 때 그분들은 아침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야말로 쌀알 한 알 없는 시금치 버무리였습니다. 소금이 없어 간은 고사하고 옥수수가루도 보이지 않고 말이 버무리지 시퍼런 시금치가 전부였습니다. 그때 저는 스스로 인민반장의 임무가 무언가를 알게 됐습니다.
동주재원을 찾아 갔습니다. 인민반에 작은 장마당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나이가 많으셨던 담당 주재원 역시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는 아들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고 그 어려움을 알고 있으니 동사무장과 협의하에 말썽이 없도록 잘 해 보라고 합니다.
다른 인민반 주민들은 일체 통제하되 실제 어려운 사람들로 하루에 교대적으로 5사람 이상 모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모양새를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메뚜기장이었습니다. 당 조직이 무서워 당 비서가 나타나면 그야말로 논밭에서 뛰어 다니는 메뚜기들처럼 순식간 헤쳐졌다가는 당 비서가 사라지면 또 순식간에 모여장사를 했고 매일 나오는 수입 중 일부를 모아 동사무장에게 중국산 고급 담배 한 값씩 사주곤 했습니다.
인민반 주변에 압록강 체육관이 있고 안전부정치 대학과 안전부 청사가 있었거든요. 메뚜기장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주민들의 어려움은 조금 덜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사회 안전부 큰 간부가 간부들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인민반 메뚜기장을 보고 사람을 보내 당장 없애라고 호령을 쳤습니다.
그로 인해 분기당 생활총화 비판을 받은 적 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에도 내가 인민반 주민들을 위해 최대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더불어 그래도 그들에게 마지막 선물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보니 뿌듯한 생각이 드네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굴에 진한 화장과 함께 각설이 옷차림을 한 분이 다가와 엿을 사라고 구성진 노래 한 가락 불러 주네요. 예상하지 않았던 춘천시장에서의 즐거운 하루와 함께 흘러간 고향 생각을 추억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