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2월 중순, 올 한해도 저물어 가고 있네요. 한 장 두 장 달력을 넘길 때마다 생각이 많아지고 있습니다만 우리 대한민국의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들과 우리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달력의 숫자들을 볼 때마다 잠시 옛날 생각에 젖어들게 됩니다. 달력의 그림들을 볼 때마다 또 매일 스케줄을 보기위해 달력을 넘길 때마다 지난날 달력 하나 제대로 구하기가 어려웠던 추억으로 마음이 짠해지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매일 가지고 다니거나 사용하는 사업노트나 수첩에도 1년 365일 적혀 있는 달력이 기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손전화기에도 달력이 있고 또 사무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책상 달력 등 그야말로 흔한 것이 달력입니다. 벌써 11월 중순이 되면 은행과 여러 상업부분이나 유통부분들에서 선물로 달력을 주곤 하는데 이렇게 받은 달력이 저에게는 여러 개가 됩니다.
사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종이가 낭비되는 달력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제 경우에는 가정에서 벽이나 책상에 놓인 달력을 잘 보지 않거든요, 하기에 모든 사람들이 저처럼 가정에서 달력을 잘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모든 스케줄은 손전화기에 기록되어 있어 수시로 전화기 달력을 많이 사용하거든요.
지난 주말에도 아들은 회사 사장님이 달력을 선물로 주었다면서 손에 달력을 들고 집으로 왔는데 그야말로 고급 종이로 만든 벽걸이 달력이었습니다. 뽀르르 달려간 손녀딸애는 삼촌의 손에서 달력을 받아 들면서 벌써 달력이 모두 10개나 된다고 말해 “우리는 달력 부자네” 하고 웃었습니다.
아들이 한마디 합니다. 이렇게 남쪽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달력을 정말로 구입하기 어려웠던 지난날 고향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 마음이 짠하기도 합니다. 북한에 있을 때, 어느 날 어렵게 구입해 벽에 걸어놓은 달력을 뜯어내서 6살 개구쟁이 아들 녀석이 딱지를 만들었습니다. 친구들과 신나게 딱지를 치고 있는 아들에게 달려가 저는 딱지를 모두 회수해 다림으로 다리고 밥풀로 붙여 벽에 다시 걸었습니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아들의 종아리를 때리며 강한 훈시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아들은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얘기합니다. 순간 저는 뭔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어 “엄마는 생각이 안 나는데” 하고 말을 얼버무리고 있는데 손녀 딸애가 삼촌다리가 아팠겠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저는 어린 손녀의 앞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안방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엄마인 내가 얼마나 혹독하게 훈시를 했으면 20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아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까, 그 상처가 얼마나 아팠으면 아직도 잊지 않고 있을까, 하고 돌이켜 보니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그 달력이 뭐기에, 그 종이 몇 장이 금쪽같은 내 자식보다 더 귀했을까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하는 자책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가정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면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들도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너무도 열악한 환경이다 보니 엄마라는 것조차 때로는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너무도 마음이 짠해 왔습니다.
사실 북한에서는 1년 12달 365일이 한 장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달력은 주민들에게 한 장씩은 공급해 줍니다. 하지만 12장으로 되어 있는 달력을 구입하기란 정말 어렵거든요. 출판사에 아는 친척 친우 그것도 각별히 친한 친척 친구가 있어야지만 구입할 수가 있답니다. 왜냐면 종이가 부족하기 때문에 달력생산도 제한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에서는 달력을 공급해 주지 않고 시장에서 달력 한 개에 쌀 몇Kg값이나 맞먹는 값으로 팔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반 주민들은 좋은 달력 한 개도 제대로 자유롭게 구입할 수가 없습니다. 하기에 저는 이곳 한국에서 해마다 질 좋고, 멋있고 또 흔하게 구입 할 수 있는 달력을 볼 때 마다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나 주민들이 생각납니다.
지난날에도 그러 했듯이 지금 평양시 장마당들에서는 달력이 아주 비싼 값에 팔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생활고를 겪고 있는 주민들은 제대로 된 달력 하나도 자유롭게 구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날짜와 시간이 흘러가는 가는지 오는지조차 모르고 살고 있을 주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