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낮 12시, 저는 뉴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12시 뉴스가 시작한지 얼마 안 돼 화면에는 '북 김정일 사망'이라는 큰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읽어 보았지만 분명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글이었습니다. 17일 오전 8시 30분 김정일이 현지지도의 길에 올랐다가 과로로 열차 안에서 사망했다고 보도됐습니다. 지난번에도 사망설이 떠돌았기 때문에 조금 의심도 했지만, 다시 울려 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애도기간은 17일부터 29일까지이며 28일 금수산 궁전에 안치한다고 했습니다. 순간 저는 통일의 날이 다가왔구나, 나도 죽기 전에 고향인 평양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빨리 뉴스를 보라고 알렸습니다. 친구들에게서 전화도 오고 문자가 연이어 날아왔습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머지않아 고향으로 가 볼 수 있지 않겠냐는 기쁨의 목소리였습니다.
1시간 내내 저는 텔레비전 앞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김정일의 활동사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 가정에서 가장인 아버지가 역할을 잘 하지 못하면 자식들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되듯이 김정일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자기 역할을 못해 300만 인민들이 죽었습니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총에 맞아 죽고,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두만강을 넘다 찬물에 빠져 죽고, 말 모르는 타향인 중국에서 귀신도 모르게 죽어간 우리 형제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2,300만 북한주민들은 울타리 없는 감옥에서 눈과 귀를 막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세상을 너무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영원히 살 것 같던 김정일이 100살도 아닌 이제 겨우 70살 나이에 객사했습니다. 죽어도 땅이 얼기 전에 아니면 땅이 녹은 진달래 꽃 피는 시절에 죽어야 자식들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는다는 북한 노인들의 유머가 있습니다. 여기 한국 같으면 아직 정정한 나이건만 살아서도 인민들에게 수많은 죄를 짓더니 죽어서까지 인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던 그날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날은 너무도 무더운 날씨였습니다. 금방 비가 멎은 뒤라 더더욱 후덥지근했습니다. 당시 인민반장이었던 저는 통일 거리 뒷정리에 동원돼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길거리에서 여학생이 큰 소리로 엉엉 우는 모습을 볼 때는 그저 스쳐 지났습니다.
금세 동네에 들어섰는데 넥타이를 손에 쥐고 가방을 든 채 엉엉 울며 학교로 가는 9살짜리 막내아들 녀석을 만났습니다. 한창 개구쟁이라 누구와 싸운 줄로 착각한 저는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엉엉 울며 아버지 대원수님께서 사망했다고 뜬금없이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들 녀석이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정신을 차리라고 볼을 때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주민들을 통해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12시 보도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고, 다시 1시 보도를 통해 정확하게 들었습니다. 점심밥을 뒤로 하고 저는 원림사업소 온실로 찾아가 꽃다발을 구입했습니다. 이미 버스와 궤도 전차는 통제되어 다니지 않는 저녁, 인민반 주민들과 아이들과 함께 대동교를 건너 만수대 동상으로 30리 길을 걸어갔습니다. 만수대 동상까지 올라가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아동백화점을 지나 종로 거리까지 꽉 찼습니다. 도중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올라 가다가 그만 숨이 막혀 더위에 질식하고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었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일성 사망 애도기간에 더위에 질식해 죽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도기간이 지난 뒤에도 강한 통제와 교육으로 매달 8일, 그리고 사망 100일, 200일 때마다 지금 현재까지도 당 조직들과 사로청, 직맹, 여맹조직 뿐만 아니라 소년단 조직인 어린 학생들까지도 꽃을 들고 만수대 동상을 찾게 하고 있으며, 아침마다 청소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사망일 때에는 그나마 여름이었기에 꽃을 구입하기가 조금 괜찮았는데, 김정일이 객사한 오늘은 눈이 펑펑 내리고 대동강 물이 얼어 있는 겨울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 사람들은 꽃을 어떻게 구입할까, 그 옛날 심술 많은 지주가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 산딸기가 먹고 싶다고 머슴을 산으로 쫓았다고 하는 옛말이 생각납니다.
오늘날 김정일의 죽음으로 인민들은 이 추운 엄동설한에 산딸기 구하는 머슴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너무도 불 보듯 뻔한 현실입니다. 저는 왜 김정일이 사망했다는데 왜 김일성 사망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건지 알 수 없지만 하나만은 알 것 같습니다. 꽃으로 인해 너무도 정신적 고통이 많았기에 그러한 것 같네요. 북한에서는 이미 일요일 오후부터 시장 문을 열지 못하게 통제를 했고 군인들은 일요일 저녁부터 비상체제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시장 문을 닫자 쌀값은 갑자기 껑충 뛰어 올랐다고도 합니다. 원래 쌀 1kg에 3,800원을 했는데 1kg에 5,000원으로 올랐고, 중국 돈 100위안에 북한 돈 9만 3천원으로 껑충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벌써 애도기간 중에 5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강한 통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고 이제 겨우 햇병아리 같은 김정은은 인민들이 혹 내부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 5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한다고 하니 정말 김정일이 보다 더 악독한 독재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생깁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후 애도 기간에 주민들이 혹 술을 마셔도, 노래를 불러도, 좋은 일로 웃어도 시범에 걸리면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고 애도기간에는 집안 대사도, 결혼식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제가 살았던 인민반에는 애도기간 술을 마시고 시장에 나가 장사했다는 이유로 지방으로 추방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정일의 죽음으로 인해 또다시 억울하게 당해야 하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을 굶주림과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며 고통을 안겨준 독재자였습니다.
한국의 많은 탈북자들은 어제 비상모임을 하고 독재자 김정일 추모 반대를 위한 탈북비상대책 회의를 하고 성명서까지 발표했습니다. 비록 김정일의 사망은 모든 탈북자들의 기쁨이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주민들이 고난의 행군을 했던 것 같이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이 뒤를 이어 주민들에게 고난의 행군 시절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게 할까 두렵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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