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냉이와 고향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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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무심결에 밭을 지나려는데 파란 냉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비와 눈이 내린데다 강추위에도 얼지 않고 파랗게 돋아 있는 냉이를 보는 순간 호미를 들고 나섰습니다. 깨끗하게 다듬은 냉이를 맑은 물에 씻어 놓으니 정말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웠습니다. 특히 길고 굵은 흰 뿌리는 정말 할아버지 수염 같기도 하고 검은 흰서리 같기도 했습니다.

겨울 냉이라 끓는 물에 푹 삶은 다음 참기름과 볶은 된장에 무쳤습니다. 봄 냉이와 별다른 게 없이 냉이 향이 너무도 진합니다.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냉이 뿌리는 쫀득쫀득 합니다.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도 별미였습니다.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식욕이 발동해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에 시간을 내어 또 다시 냉이를 캤습니다. 사실 12월 추운 겨울 벌판에서 냉이를 캐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 그리 쑥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북한 주민들의 생각에는 '무슨 이 추운 겨울에 냉이가 있을까, 혹은 먹을 반찬거리가 많은 서울 사람이 때 없이 무슨 냉이를 캤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먼 옛날 북한당국에서 세뇌교육을 시키던 대로 먹을 것이 없어 이 추운 겨울에 냉이를 캤을까요? 그것도 이것도 아닙니다. 이곳 서울 사람들은 복잡한 도시에서 살다 보니 시골을 엄청 좋아 하거든요.

요즘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공기 좋은 시골로 돌아가서 정착합니다. 남한에서는 이런 것을 귀농이라고 부르는데요. 특히 나이든 어르신들은 시골에서 땅 냄새와 손에 흙을 묻혀가며 농사를 짓는 것을 건강에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지금 한국 사람들은 햄버거나 피자 그리고 가공된 음식을 많이 먹을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 소고기를 비롯한 고기류를 엄청 먹거든요. 이렇게 식성이 변하다 보니 건강에 좋다는 건강식품을 많이 찾는답니다.

저 역시 이곳 한국에 온지 10년이 지나다 보니 인제는 한국 사람이 다 되어 건강식품, 즉 내 몸에 좋다는 것을 먼저 찾아 먹는 것을 취미로, 즐거움으로 만끽하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흙냄새와 풀냄새도 맡아 가며 내 건강을 위해 농사를 지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또 이곳 서울은 북한보다 그리 춥지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12월 겨울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냉이뿐만 아니라 벌판에는 새파란 나물들이나 채소들이 많답니다. 냉이도 내 땅에서 내 밭에서 즐거운 시간과 좋은 추억을 나름대로 간직하면서 건강에 좋은 냉이를 캤거든요.

냉이를 캐가지고 오는 도중 가족들에게 냉이 무침을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가족들은 좋은 경험을 하고 있는 엄마가 부럽다고 합니다. 저녁식사 메뉴는 울릉도에서만 나온다는 부지깽이 나물밥에 냉이무침에 냉이국입니다. 푸짐한 건강식품으로 저녁식사를 하며 즐거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다시 지나온 고향에서의 추억을 더듬었습니다.

먹을 반찬이 부족했던 그 시절 3월의 쌀쌀한 봄바람을 피해 양지쪽에 돋아난 작은 미나리와 물쑥뿌리를 캐다가 무쳐 식탁에 올려놓았고 잎과 뿌리가 쎈 가을 냉이는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가을 냉이도 캐다가 반찬으로 먹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정말 그 때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 평양시에 인접한 벌판을 돌아다니며 냉이를 캐다가 반찬을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부지깽이 나물의 진한 향과 겨울 냉이의 진한 향으로 입맛을 돋는 내 가족을 위한 건강음식, 그야 말로 웰빙음식으로 푸짐한 식탁을 마련했네요. 내 고향 평양에서는 때 아닌 겨울 냉이를 캐다가 맛있는 별미로 반찬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평양은 서울 날씨보다 훨씬 춥거든요. 아마 지금쯤 평양은 땅이 꽁꽁 얼어붙고 흰 눈이 온 강산을 덮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추위 속에서 겨울 냉이무침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땔 걱정이 없는 이곳 한국생활 속에서 언제나 이맘때면 내 고향 주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날씨가 추울수록 배고픔은 더 하고 배고픔이 더 할수록 추위는 더 하기 마련이거든요. 하기에 추위와 배고픔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입니다.

저는 추위가 닥쳐오는 이맘때이면 먹을 것이 부족해 산나물과 들풀을 이용해 때 거리에 보탬이 되게 하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 북한에는 추위는 없고 봄과 여름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도 내 고향 이웃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따뜻한 집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