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비빔국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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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주말농장에 들깨 모를 심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큰 길거리에 있는 함흥냉면 집에 들렀습니다. 삼복더위 땡볕아래에서 많은 땀을 흘린 탓인지 함흥냉면 집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시원한 감자 녹말 비빔냉면을 한 그릇 받아 놓았습니다. 겨자에 식초에 버무려 한참 냉면을 먹다 말고 얼결에 담벽에 씌어 있는 '국수가 먹고 싶다'는 짧은 시 한 구절을 보게 됐습니다.

'세상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치 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던 제 마음은 어느새 지나간 고향 생각과 쓸쓸함과 더불어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해마다 7, 8월 장마로 아궁이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해 부엌에는 완전히 물이 들어차 있어 아궁이에 불을 댈 수가 없었죠. 그럴 때면 넓은 마당에 쇠 가마솥을 걸어 놓고 흰 밀가루 손 반죽으로 나무로 만든 국수 분틀에 동네 사람들과 함께 국수를 눌러 먹었거든요.

워낙 어린 시절부터 국수를 싫어했던 저는 매일 저녁이면 국수를 먹지 않겠다고 떼를 쓰며 울었습니다. 어머님께서 때로는 아침에 해 놓았던 묵은 밥으로 항상 볶음밥을 만들어 주었고 묵은 밥이 없는 날에는 밀가루 떡을 구어 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그때에는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북한 당국에서는 식량 사정과 관련해 하루 한 끼는 국수를 먹으라는 방침까지 내놓았습니다.

국수가 너무도 싫은 저는 하물며 당에서 국수를 먹으라는 방침까지 내려 보낸다고 불평불만도 없지 않았습니다. 평양시민들에게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식량공급이 중단되자 하루 세끼 옥수수 국수를 먹어야 했습니다. 집안에 있는 재산을 긁어모아 들고 황해북도의 시골을 찾아다니며 옥수수를 바꾸어 하루 세끼 국수로 살아야만 했던 그 시절 정말 남모르게 많이 울었습니다. 그 시절 북한 주민들은 시장에서 제일 싼 옥수수 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워야만 했습니다.

한 번은 우리 아이들과 함께 자강도 평원에 있는 시 삼촌 집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거든요. 흰쌀 구경이란 전혀 할 수 없는 자강도 평원이라는 곳은 그야말로 기차도 다니지 않는 심심산골이었습니다. 보리 감자가 주식이었습니다. 5일 동안 내내 보리 감자를 삶아 주는데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저는 비로소 옥수수 국수가 보리 감자보다 고급이라는 사실과 국수의 참맛을 알게 됐습니다. 희천 역에 도착해 길거리 작은 메뚜기 시장에서 파는 옥수수 국수를 별미 있게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그 이후 국수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어 국수를 먹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옥류관, 모란각, 청류관 등 국수집을 자주 찾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아이들은 때때로 옥류관 국수가 그립다고 합니다만 고향의 향수를 느끼기 위해 함흥냉면 집을 자주 찾는답니다. 함흥냉면에는 동태 식혜가 제 맛이거든요. 어쩌면 짧은 시 한 구절 한 구절이 고향에 대한 추억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오늘도 고향 주민들의 고달픈 현실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머님이 마당 한가운데 걸어 놓은 쇠 가마솥에 나무분틀에서 눌러 낸 국수를 삶아 오이냉국에 말아 주던 시원한 국수가 그립네요.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삼복더위를 쫓아 버리며 시원한 국수를 한 세 그릇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흥 비빔냉면과 함께 고향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