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태풍이 지나간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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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저는 잠을 자다가 바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새벽 5시였습니다. 강한 태풍으로 인해 아파트 베란다 문이 흔들거리고, 빗물이 억수로 튀어 들어오고 있는데도 아들은 잠을 자지 않고 온밤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텔레비전을 끄고, 아파트 베란다 문을 닫으려고 베란다로 나가 호기심이 생겨 잠깐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 강한 태풍에 도로가에 심어놓은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몹시 흔들거리고 있는데도 버스와 승용차들이 쉴새없이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무섭지도 않나? 위험하기 그지없는데 아무 생각 없이 차를 운전하다니' 하고 혼자 소리를 했습니다. 아들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베란다 창가로 다가갔습니다. 창가로 다가간 아들은 놀랍게도 손전화기를 들고 바깥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이 나이가 되도록 이렇게 강한 태풍은 처음이라 저는 무섭기도 하고 겁도 나서 복도 창문을 비롯해 열어 놓았던 창문을 모두 닫았습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떨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잡고 앉아 아들에게 무섭지 않느냐고 하면서 빨리 베란다 큰 창문을 닫으라고 말했습니다.

아들과 둘이 앉아 텔레비전을 다시 켜고 보고 있는데 평택에 살고 있는 작은 딸한테서 손전화기로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 전기가 끊어지고, 옆집들에서는 창문 유리가 깨졌다고 했습니다. 큰 딸한테서도 전화가 왔습니다. 잠에서 놀라 깨어난 손녀가 품에 꼭 안겨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남한에 와서 전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부족한 것 없이 살던 아이들이라 오랜만에 자연현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정전이 된 것도 불편한 모양이었습니다. 촛불을 켜고 밥을 먹는다고 불편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자,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어디에서는 전기가 많이 끊겨 시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나무들이 많이 넘어졌다고 했습니다. 출근시간이 되어 저는 동료들과 함께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정말 뉴스에서처럼 길거리의 나무들이 넘어져 거리가 조금 스산했습니다. 회사 동료들도 출근하자마자 모두 새벽에 있었던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습니다. 정말 처음 겪어 보는 태풍이라 저 뿐만이 아니라 회사 동료들 모두 놀랐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퇴근길에 보니 아침에 조금 어수선하던 도로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다음날 기차를 타고 충남 서천을 다녀왔습니다. 친구들은 태풍으로 인해 어쩌면 기차도 못 다닐 것이라고 해서 저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습니다. 열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저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간간이 산에 나무들이 쓰러져 있기는 했지만, 언제 태풍이 불었냐는 듯이 거의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도 흔들흔들 가을이 왔다고 좋아했고, 집집마다 텃밭에 달린 고추들도 빨간 얼굴을 내밀고 좋아라 웃어주었고, 산의 나무들도 별일 없었다는 듯 가지를 흔들며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큰 태풍이 왔어도 남한은 이처럼 금새 정상을 찾는데 북한 지역은 어떨까 걱정이 됐습니다. '북한에도 태풍이 지나갔을 텐데, 지금쯤 북한의 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평소에도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고 생활이 열악했을 것인데, 태풍 때문에 더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언제가 강한 강풍으로 인해 내가 살던 평양시내 도로의 가로등과 전선대가 넘어지고, 단층집 건물의 기왓장들이 날아가고 부서져서 아수라장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방 안에 빗물이 새는 바람에 여기저기에 양동이와 소랭이를 받쳐 놓아야 했고, 전기가 끊겨 열흘 동안이나 전기도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돗물도 먹을 수가 없었지만, 주민들은 불편을 그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도, 친구들도 이젠 남한 사람이 다 된 듯합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제법 호소할 줄도 압니다. 사람은 항상 주위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가 봅니다. 이번 주에도 지난 번 태풍 보다는 조금 약한 태풍이 남쪽으로부터 동해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곳 남한 사람들은 별로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태풍이 불어와도 정부와 국민이 똘똘 뭉쳐 미리 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