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외부로는 러시아, 일본, 중국 간의 완력 다툼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이런 혼란스런 시대에 태어나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참하게 인생을 마친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명성황후입니다.
(KBS 드라마 '명성황후')
지난 2001년부터 2002년 남한 KBS방송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명성황후'입니다. 명성황후는 그가 시해된 지 100주년이 되는 1995년 가극으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비록 100여년 전 비통하게 사라져간 인물이지만 명성황후의 이름은 오늘날 후손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 중에 한명입니다. 그러나 남한의 역사학계에서는 명성황후가 혼란한 시기에 나라를 위해 투쟁한 여장부인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싸우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인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851년 경기도 여주에서 사후 영의정으로 추봉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난 명성황후는 8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명성황후는 16살의 나이에 고종에게 시집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의 추천으로 왕비의 자리에 올라왔지만 왕세자의 문제로 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과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은 결국 정치적 갈등으로 확대되고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반대파들과 세력을 규합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 했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집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 씨 집안사람을 조정의 요직에 앉혔습니다.
남한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의 하원호 교수는 남한의 역사학계에서 명성황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원호
: 명성화후는 예전 매천야록 등의 책에서 비판적으로 많이 나왔다. 일본이 민비로 얘기하기 전에 이미 국내에서도 명성황후를 격하 시켜 민비 라고 불러왔다. 민비 뿐만 아니라 민비 척족들이 했던 행동들이 구한을 망국으로 가게 된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민비를 재평가하면서 민비를 국모로서 평가하고 있다. 민비는 실제로 고종보다 정치력이 강한 인물로 한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민비에 대한 평가가 좋다.
명성황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은 명성황후가 폐쇄적인 조선을 개화로 이끌었다고 평가합니다. 대외적으로 흥선 대원군이 고집하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1876년에는 병자수호조약을 채결하는 등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조선의 문을 외국에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명성황후는 열강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지혜로운 외교력을 발휘한 인물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원호 교수는 민비의 지혜로운 외교력에도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하원호
: 결국은 민비도 권력의 한계에 따라서 필요하면 외세를 끌여 들여 국내문제를 해결 하려 했고 민비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 문제는 자신의 권력과 관련해서 행동했기 때문에 친 일도 했고 친 청도 했었고 필요하다면 친 러도 했던 사람이다. 일본 낭인들에 의해 죽은 을미사변의 경우도 친일에서 친러로 가는 과정에서 일본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 민비를 죽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2000년도에 들어서 남한에서는 명성황후에 관한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책 등 그의 삶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서적이나 영화 드라마는 명성황후의 비참한 죽음을 중심으로 조명하고 있어 그의 삶을 너무 낭만적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다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지적합니다. 하원호 교수도 최근 남한에서의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도 너무 감성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은가 우려된다고 말합니다.
하원호
: 민비에 대한 평가 역시 학문적 평가라기 보다는 감정적 평가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고 명성황후라는 뮤지컬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학문적 평가에서는 민비를 그렇게 높이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한편 북한에서의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다른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봉건지배층의 폐단과 부패를 비판하는 쪽으로 잡혀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북한 평양출판사에서 발간한 조선사화집을 보면 명성황후를 민비로 민 씨의 친족들을 ‘민 씨 일파’로 서술하면서, 명성황후의 외교적 지략을 사대굴종적인 대일 외교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조선백과대사전에는 명성황후가 '반동적인 수구파 집단을 꾸리고 봉건양반들과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모든 진보적 성향을 무조건 탄압하여 인민들에게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으며, 대외적으로 사대 투항 주의적 외세의존정책을 펼쳤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원호: 민비 자체를 따로 평가 한다 기 보다는 민 씨 척족을 북한에서는 민비를 따로 떼어서 평가 한다 기 보다는 민 씨 척족의 부폐와 무능 그리고 외세와의 결탁 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민비를 따로 평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당대 명성황후를 만났던 외국인들 한 결 같이 명성황후가 총명하고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라는 책을 통해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 갈등을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이라고 묘사 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 왕실의 의사였던 언더우드 여사도 명성왕후가 우아하고 근엄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반면에 당시 일본 화가들이 남긴 명성황후의 삽화는 모두 그 모습이 뚱뚱하고 심술궂게 그려져 있으며 일본 외교관들은 명성황후를 '여우'로 불렀습니다.
이렇게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의 시각이나 정치적 이념에 따라 각각 다 다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혼란스러운 평가는 비단 명성황후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평가가 앞으로 남북 역사학자들에게 놓여 진 과제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