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22] 남과 북의 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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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주체사관은 인민들의 투쟁역사를 창조의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투쟁역사는 내부적으로는 계급적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며 외적으로는 반침략 투쟁을 말합니다.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오늘은 남과 북이 보는 투쟁역사를 살펴봅니다.

북한의 역사 해석은 유물사관에 입각해 계급론적 관점에서 역사적 사건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은 홍경래의 난과 이시애의 난 등과 같은 민중 투쟁사를 높이 평가하고 이것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1467년, 세조 13년에 함경도 호족이었던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은 북한에는 함경도 농민전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당시 함길도는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대치하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지역 출신의 호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세조가 집권하면서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그 지역 출신의 관리들을 경관으로 대체하고 새로 임명된 관리들에게 지방 유지들의 자치 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도록 조치했습니다.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해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 감독에 대한 불만과 지역 백성들의 지역감정과 편승해 동생인 이시합과 매부 이명효와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1467년 8월 이시애는 조정의 토벌군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3개월 동안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됩니다.

이상은 남한의 역사에 기록된 이시애의 난입니다. 그러나 북에서는 이시애의 난 즉 함경도 농민전쟁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시애의 난이 농민들의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시애의 반란은 서울 양반들에 대한 함경도 지방 양반들의 쌓이고 싸인 불만의 폭발 이었으며, 이시애의 반란이 함경도 곳곳에 알려지면서 지방의 수많은 농민들도 투쟁에 일어섰다고 북한 역사책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역사해석은 지배층들의 권력 다툼보다는 농민들의 봉건세력에 대한 불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역사적 해석은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 즉 홍경래 농민폭동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북한은 이 사건도 지방 농민들과 봉건통치배들의 갈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렇게 농민들의 반란과 지배세력들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것은 계급론적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동국대학교 북한학 연구소의 전미영 교수는 말합니다.

전미영

: 기본적으로 북한은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민중사관을 중심을 서술하고 있다. 남한이 왕의 업적을 중심으로 서술한다면 북한은 왕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적기도 하고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에 있어서도 남쪽은 세종대왕이 창제했다고 보는데 북한에서는 세종대왕시기에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미묘하기는 하지만 큰 차이일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구한말이나 조선시대의 민중반란을 난이나 봉기로 보는데 북한에서는 그것이 지배계급이나 착취계급에 대한 저항이나 투쟁으로 평가한다. 이를 높이 평가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의 역사학계가 농민들의 투쟁과 봉기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단이후 남한과 북한 역사학계가 모두 일본이 남기고간 식민사관을 버려야 한다는 공통적인 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남한의 역사학계도 민중을 역사의 중심에 두는 것은 마찬가지 이며 그러한 움직임은 최근 들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전미영

: 그런 면에서 우리 역사학계도 민중사관 관점에서 보고 있고 또 평가들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역사학자들이 북한 역사학의 평가에 대한 영향도 무관하지 않은... 예를 들어 북한이 역사를 본인의 권력이나 김일성의 가계에 대한 현대사에서는 상당히 왜곡 날조가 나오지만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계급론적, 유물론적 역사해석이기는 하지만 사실 역사왜곡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해석의 차이이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역사의 해석이 다양하고 지평이 넓어지면서 북한 역사학계에서 평가하는 것과 같이하는 부분도 상당히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반침략투쟁 역사에 있어서는 남북 간의 차이의 골이 더 깊습니다. 북한의 역사학에서는 고조선 이래 대다수의 피 지배층 계급이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반침략 투쟁의 주체로 싸웠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에 대한 평가나 언급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한 예로 1977년 발간한 조선통사에서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일본을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로 조선의 백성들이 결사적으로 싸웠다는 점을 첫 째로 꼽았고 또 두 번째로 조선의 군사력이 일본의 군사력보다 강했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도록 지휘했던 이순신 장군이나 권율 장군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오히려 이들이 봉건왕권에 충성하며 양반 지주 계급을 위해 싸웠을 뿐이라며 그들의 업적을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북한의 이러한 역사 해석은 역사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은 김일성 밖에 없다는 주체사관의 수령 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북한의 반침략 투쟁사에 대한 서술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북한 역사학계는 임진왜란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주체는 민중이라는 점에는 입장의 변화가 없지만, '양심적인 양반들' 그리고 '애국적인 유생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민중의 투쟁에 봉건지배층이 동참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분단이후 갈라서게 된 남과 북의 역사관은 애국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