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과 북한의 역사적 해석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곳은 근현대사입니다. 북한의 근현대사는 김일성의 혁명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어 당시 역사적 사건들은 대부분 김일성 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역사왜곡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바로보는 한반도 역사에서 그 예를 살펴봅니다.
1866년 8월15일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장마로 불어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로 진입했습니다.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는 영국의 메도스상사와 결탁해 비단과 유리그릇 그리고 천리경 등 서양 물건들을 싣고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를 통역으로 삼아 조선과의 통상을 뚫기 위해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프랑스의 군함이 조선으로 침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 평양 관원들은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침내 평안도 감찰사 박규수는 셔먼호가 평양 경내에 정박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평양에 온 목적을 물었습니다. 통역관이었던 토머스 선교사는 선원들의 국적을 밝히고 조선과 상거래를 하기 위해 정박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과의 교류가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됐고 또 법으로도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관찰사 박규수는 셔먼호가 평양을 떠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동시에 박규수는 셔먼호에 식량과 땔감 등 구호물자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셔먼호는 조선 측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배를 만경대 아래 두루 섬 앞까지 끌고 올라왔고 그들의 행동을 살피던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습니다. 셔먼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평양 주민들은 돌을 던져 항의 했고 셔먼호는 조총과 대완구를 주민들에게 쏘아 대는 등 사태가 더욱더 악화 됐습니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사태가 이렇게 되자 중군 이현익을 구출하고 셔먼호를 공격하기로 결심합니다.
박규수는 철산 부사 백낙연 등과 함께 셔먼호를 불로 공격해 배를 전소 시키고 셔먼호 선원들은 격분한 평양 주민들에 의해 모두 참사 당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몇 년 뒤 미군 군함들이 침입하는 신미양요의 원인이 됩니다. 이 같은 내용은 남한 역사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북한의 역사책에서는 셔먼호에 대한 서술이 전혀 다릅니다. 북한의 역사책에 따르면 셔먼호는 미국의 군함 이였으며, 이 투쟁의 중심인물은 김일성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응우로 나와 있습니다. 남한 동국대학교 북한학연구소의 전미영 교수의 설명입니다.
전미영
: 북한에서는 셔먼호 사건을 이끌었던 인물은 김일성의 증조부라고 하고 있다. 그 시점이 김일성의 할아버지 연령대이기 때문이다. 남한 학계에서는 사실 확인이 어렵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라는 사람이 셔먼호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라고 기록을 해 놨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고종 실록과 평양사 그리고 패강록 등에서 사건의 전모와 성격이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서도 김일성의 증조할아버지 김응우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 측에서는 김응우가 결사대를 조직해 셔먼호를 공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미 교육에 적극 활용하고 있지만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조선 조정에 올린 민관군 포상대상자 27명에는 김응우란 이름이 없습니다. 전미영 교수는 북한이 셔먼호 사건을 김일성 가계와 연관 시키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전미영
: 북한에서 외침을 물리쳤다는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이 크다. 특히 미국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있다.
북한의 근현대사 왜곡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919년 3월1일 일어난 3.1만세 운동의 주역을 남한과 세계 다른 나라에서는 유관순으로 보는 역사관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3.1운동의 주역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미영
: 이것도 북한 역사학계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서울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3.1운동을 이끈 사람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 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사례를 보면 그때 김일성도 어린나이에 같이 참여했다는 얘기도 있다.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3.1운동이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의 서울 시민들이 반일투쟁을 시작해 발생한 것이라고 서술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1980년부터는 3.1운동이 평양 장대제에 있는 숭덕여학교에서 수 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직접 육성한 애국적인 청년학생과 인민들이 앞장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고 주장합니다. 북한에서는 또 유관순 열사도 김형직의 가르침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당시 7살이었던 김일성도 만경대에서부터 평양성까지 시위대열에 앞장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북한 역사책은 서술하고 있습니다.
북한 역사학계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남한 역사학계나 세계 다른 역사학자들은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북한 역사학계의 이러한 역사 서술은 김일성 일가의 전통성을 세우기 위한 역사왜곡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진행에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