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의 한인들은 점차 확산되면서 2-3세 한인들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음은 한민족으로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해를 거듭하면 할수록 세계인들은 한인들을 우수한 민족으로 칭찬해주고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휴스턴 한인사회 봉사자로 활약하는 휴스턴 김수명 한인회장의 삶의 현장을 찾아간다.
김수명 씨는 1,960대 초 한국이 어려웠던 시기, 미국에 올 때까지 원 없이 열심히 일했단다. 고개 한번 돌릴 틈도 없이 삶이 지칠 정도로 열심히 일했는데 그 당시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고 한다.
김수명
: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오랫동안 약업계에 종사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먼저 미국에 와 있던 형제들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제가 1983년도에 가족과 이민 왔는데 아들만 셋입니다. 당시 국민학교 5-6학년인 자녀를 데리고 한 번 미국을 가보자! 가서 제2의 인생을 부딪쳐보자는 각오로 처음에 뉴욕에 왔습니다. 뉴욕에 와서 삶의 터전을 잡는다고 열심히 했지만 시작한 사업이 3년 만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당시 개인적으로도 부끄럽고 실의에 빠졌던 한때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우연히 휴스턴에 오게 됐습니다. 휴스턴에 온 것이 1987년도입니다. 87년에 휴스턴에 와서 오늘까지 한 20여 년을 정착해 한인사회를 위해서 봉사를 할 기회를 얻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수명 씨는 휴스턴에서 신문사 지사장 일을 시작으로 한인 방송국에서도 한인들을 위한 방송도 했다며 뿌듯해한다.
김수명
: 제가 휴스턴에 와 있을 때 주위에 인맥이 닿아서 조선일보 텍사스 지사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한 10년 맡아 일한 것 같습니다. 또 이후 현지의 한인 방송국이 있었는데 거기서 방송운영위원을 맡아달라고 해서 한 2-3년 ‘휴스턴 사랑방’ 프로그램으로 1주일에 한 번 30분 생방송을 했는데 일주일에 있었던 주요 이슈들 또는 미국의 소식, 국내소식 등으로 방송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수명 씨는 처음 미국에서 리코스토어(술 파는 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김수명
: 한국에서 종사하던 전문직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저도 주변의 권유로 뉴저지에서 리코 스토어, 술만 전문으로 파는 가게를 샀습니다. 제가 원래 술을 못 마시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뉴저지의 좋은 동내에 들어가서 17년 된 미국이 경영하던 가게를 사들였습니다. 자녀도 이곳 국민학교에 들어가고 그때 미국 생활을 처음 시작한 겁니다.
김수명 씨는 한 3년 동안 리코스토어를 경영하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법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김수명
: 술을 팔다 보니까 저녁에 젊은 아이들이 와서 술을 사가는데 나이를 분간할 수 없어요. 그 당시만 해도 21세인가 그 나이 아래 청소년들에게 술을 팔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도대체 손님이 어리게 보인다 하면 운전면허증을 확인하고 팝니다만 그것이 여유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함정수사를 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 걸리면 그 당시 500달러 벌금을 물곤 했는데 1년에 5번인가 걸리면 문제가 됩니다. 1년에 5번 걸리면 법정까지 가야 하는데 그런 일이 문을 열자마자 1년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김수명 씨가 사업하면서 법정에 갔던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수명
: 재판 날에 법정에 변호사를 동행하고 갔는데 그 자리에 보니까 여러 가지 사건이 재판에 계류 중이었습니다. 방청석도 꽉 차있고 지역 경찰 국장이 있고, 시장을 비롯해 단상에 10여 명이 앉아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문제를 해결하는데 저의 차례가 왔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오늘날까지 살면서 그날처럼 영어를 잘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어를 잘했다는 게 아니라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지금 제 삶을 망가뜨리느냐 아니면 다시 살아나느냐 기로에 섰던 문제인데 잘못되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저의 변호사가 변론하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손을 들어서 영어 잘하는 한국사람을 부르겠다 했더니 안된다는 거예요. 저보다 직접 하라는 겁니다. 할 말 있으면 그래서 제가 그때 함정수사에 의해서 이런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어떻게 함정수사를 할 수 있느냐! 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때 삼현이란 회사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우리 자녀가 전부 현자 돌림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식들을 늘 기억하고 그런 애정을 갖고 사업을 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그런 걸을 영어로 이야기로 하면서 호소했습니다. 저는 이 지역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어떻든 한 달 문을 닫아야 된다는 이런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 달문을 닫는 기억도 있습니다만 참 저에게는 시련이었습니다.
김수명 씨는 장사하는 동안 죽음 직전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도 들려준다. 장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겪은 시련이었고 결정적으로 휴스턴으로 가게 된 동기였다고 회고한다.
김수명
: 어느 날 가게에 경찰국에서 대낮에 전화가 왔습니다. 비상벨이 울렸던 가 봐요. 제 가게 전화선이 잘못되어서 일이 벌어졌는데 제가 가게를 나가는 순간 경찰들에 의해 포위가 되었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뒤 짐 지고 나가다가 정말 위태로운 총격을 받을 (저를 범인으로 착각해) 위기에 처했습니다. 경찰이 총을 발사할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 미국 종업원이 뛰어 나와서 손을 번쩍 들게 해서 제가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는지 미국생활 1년 만에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김수명 씨에게 미국생활에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물어봤다. 625를 겪은 체험이 가장 큰 무기라고 이야기한다.
김수명
: 저는 어렸을때부터 6.25를 겪었습니다. 625때 국민학교 1학년이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살 때인데 창경국민학교 1학년 때 입학하고 3개월 후에 625가 일어났습니다. 아버님이 북한이 고향이시고 해서 인민군들이 들어온 후 아버님이 어느 날 인민군에 끌려가셔서 한 달 만에 기어서 집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어린 나이에 직접 봤습니다. 충청도 옥산이라는 데로 피난을 갔는데 그 엄동설한에 아버지를 이불에 뚤뚤 말아서 리어커에 태우고 어머니는 갓난 동생을 등에 업으시고 저는 앞에서 리어커를 끌고 둑을 걸어서 100리 길을, 제 생각에는 100리가 넘는 것 같습니다. 또 현지에 가서 나무하러 가는데 10리길, 20리길, 50리길 산을 넘고 넘어서 그때는 인근에 나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부 잘라 땠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없으니까 산봉우리를 넘고 넘어서 나무를 해서 제가 그때 어렸으니까 지게를 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끼줄 서너 개 들고 나무를 저 가지고 동내 어르신들 가는데 졸래졸래 따라가서 그분들이 출발하기 전 1시간 전 먼저 출발해야 된다는 당혹감, 허리와 어깨가 끊어지는 아픔, 오면서 나뭇짐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내려놓으면 혼자 들고 일어날 수가 없으니까 언덕에 기대서 하늘을 보면서 그 어린 시절에 그 고통이 얼마나 아픈지를 체험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지금도 내 마음속에 꽉 차 있는 것 같아요. 어려운 사람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만 그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습니다. 저 고통을 나는 이겨낼 수 있는데 저분은 참 힘들겠다. 이런 마음이 앞섭니다. 어릴 때부터 어려운 시기에 자란 저희로서는 그런 것들이 깊이깊이 내재해 있는 것 같아요.
김수명 씨가 휴스턴 한인사회에 봉사하면서 절대 한인회장은 안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저를 위해 후원의 밤까지 열어주는 동포사회의 열정으로 순종하고 26대 한인회장으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김수명
: 저는 한인사회의 이런 일 저런 일로 봉사를 한 20년 했습니다만 저 자신하고 약속은 한인회장만큼은 반드시 피한다는 것이 저와의 약속이었습니다. 제가 아마 한인회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 한 10년 전 15년 전에 했을지도 모릅니다. 항상 한인회장 선거 때가 되면 제1호로 저에게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제가 그때마다 피했습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면 한인회장 선거 때마다 그런 현상을 각 도시에서 보고 있습니다. 한인회장을 하겠다고 경쟁하고 싸우고 법정으로 가고 이런 소란 속에서 한인회장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과연 동포들이 그런 한인회장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한인회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라는 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회피하다가 지난 2년 전 2008년 3월 1일부로 26대 한인회장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추대받아서 저는 또 추대를 한다고 해서 선 득 나서기도 뭐하고 해서 한 한 달 사양을 하고 거부를 했습니다만 또 지역에서 저를 위해서 후원의 밤까지 열었습니다. 저는 후원의 밤 행사에 참석해서 한인사회 한인 동포들이 저를 위해서 이런 귀중한 시간을 갖는데 제가 이것까지 거절한다면 이것도 하나의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지에 나가서 수락했는데 지난 2년 2010년 3월 1일이 2년 잘했든 못했든 한인사회의 숙원사업인 한인회 건물을 시작했고 그래서 끝내려고 했습니다만 또 동포들의 염원에 의해서 완성하는 데까지 일을 해야 되지 않느냐! 해서 또 2년 더 출발을 하는 와중에 있습니다.
김수명 씨는 한인회장으로 일하면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할 것을 다짐했단다.
김수명
: 지난 2년간 제가 시도했던 것은 휴스턴 한인회는 동포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라는 제하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는 것 등 한 20개 항목, 심지어는 쌀이 필요하십니까? 어려운 사람에게 주려고요. 그러나 누가 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다마는 쌀을 필요로 하신 분은 언제든지 한인회에 오십시오 해서 쌀을 비축해 놓았고 이렇게 쌀을 비축해 놓을 만큼 한인회가 애정을 갖고 한 번 봉사를 시도를 해봤습니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그것이 상당히 동포들에게 공감이 가는 활동을 해왔다고 나름대로 위로를 합니다만 그래도 부족한 게 많겠지요.
김수명 씨가 휴스턴 한인사회에서 큰 책무는 한인 2-3세에게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수명
: 무엇보다도 지역에 한인 학교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 한인사회에 의무와 책임이다는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가 이것은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 그런 일에 아마 적응을 했던 것 같습니다.
김수명 씨는 현재 민주평통 휴스턴 협의회 회장직도 겸하고 있다. 동포들에게 통일에 대한 의식을 고취해 드리고 싶단다.
김수명
: 13년 전에 탈북했던 황장엽 씨가 돌아가셨더라고요. 그분이 평소에 하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못사는 북한보다는 남한이 더 걱정이다.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그분이 남한에 와서 북한의 높은 지위에서 남한에 와서 보니까? 못사는 북한보다 남한을 더 걱정할 정도로 남한의 안보문제가 심각하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그런 느낌도 받았습니다. 저는 임기 동안 안보강연자, 북한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북한 지식인의 탈북자를 초청합니다. 그래서 동포들에게 통일의 의식을 고취하려고 합니다.
김수명 씨는 이제 세 자녀가 가까이 살면서 행복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좀 더 효도하지 못함도 이야기한다.
김수명
: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머니 아버님 미국에 와서 아버지는 84세 어머니 82세 다 돌아가셨습니다만 그동안 사시는 동안에 부모님에게 잘 모시지 못한 그런 것들이 전부 마음속에 아픈 상처로 남기고 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휴스턴 한인사회 봉사자로 활약하는 휴스턴 한인회 김수명 한인회장의 삶의 현장을 찾아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