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생생뉴스] 미국 대학입시 준비하는 탈북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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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 를 중심으로 서부 지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소식과 한인사회소식 등을 전해 드리는 LA 생생 뉴스 진행에 재미 언론인 정현숙 씨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17살의 어린 나이에 홀로 북한을 떠난 후, 지금 미국에서 씩씩하게 지내고 있는 대니 리 이야기, 그리고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일본 쓰나미와 관련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양쪽 귀에 라디오 수신기를 꽂고 미국노래를 흥얼거리는 대니 리는 누가 봐도 전형적인 미국의 젊은입니다. 그러나 대니는 탈북자로 미국에 온지 4년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미국인, 한인들의 도움으로 여기저기서 일도 해가며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어공부만 했지만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한 시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금년에 졸업장을 따면 대학에 간답니다. 이제 일상영어는 어느 정도 하지만 공부를 영어로 하려니 매우 힘듭니다. 대니의 얘기 들어보죠.

CUT: 처음에 미국에 와서 어리둥절했어요. 솔직히 문화도 모르고, 생활 경제 아무것도 모르는 땅에서 작하려니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증명을 따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검정고시 같은 시험 공부인데 검정고시 보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면 앞으로 대학교에 갈 수 있고...

지금 스물세 살인 대니는 17살 때 북한을 떠났습니다. 너무 굶주리는 것이 싫어서 떠났다네요. 그런데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 안갈 만큼 지금 대니는 잘 생긴 외모에 건강한 몸을 갖고 있습니다. 대니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회사에 다녔던 어머니, 외할머니와 살았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이 정권을 잡은 후부터 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어머니가 다녔던 회사는 망했고 학교에서는 전과 달리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힘든 일을 시켰습니다. 겨울철이면 군인들을 위해 모든 학생들에게 토끼 가죽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집에서 토끼를 기르지 않는 학생들은 시장에서 사다가 갖다내야 하는데, 집에 먹을 것도 없는 대니가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쌀 한주먹이 있으면 물을 가득 넣고 끓여 삼일씩 먹곤 하는 생활이었으니까요.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것을 못 가져가는 학생들은 매를 맞았습니다. 대니도 늘 맞았습니다. 맞는 것이 너무 싫은 대니는 학교를 빠지기 시작했고 집을 나오기도 했습니다.

대니가 북한을 떠나기로 한 것은 논밭이 모두 눈에 덮인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낟알 하나도 주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대니는 중국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집에는 얘기도 안하고 중국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해오겠다는 생각으로 몰래 국경을 향해 떠났습니다. 4시간을 걸어 국경에 도착했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중국 국경 쪽에는 물이 녹아 강에 빠지는 바람에 온 몸이 물에 젖었지만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추위도 몰랐습니다.

중국 땅에 도착해서도 대니는 산길로만 갔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산속에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주인이 조선족이었습니다. 솔직히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니, 먹을 것을 주고 도시로 나가는 길을 알려줬습니다. 다소 마음이 놓인 대니는 얼어붙는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고, 쓰레기장에 버려진 옷을 주워 입고 또다시 10시간 산길을 걸어 '안도' 라는 도시에 당도했습니다. 대니는 그곳의 한 공장을 찾아가,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먹고 자게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곳은 천을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대니는 그때부터 일 년 반을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일했습니다. 돈도 못 벌고 그러고도 늘 불안했던 어느 날 교회가 눈에 띄었습니다. 조선족 교회였습니다. 대니는 그곳에 가서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해 북한의 가족에게도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으니 도움을 달라고요. 그 다음에 교회에 갔을 때 대니는 난생 처음 서양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중 한명이 한국말로 물었습니다. 필요한 게 뭐냐, 북한에 가고 싶냐 하는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다음에 만났을 때 그들은 대니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cut: 어떤 분이 저에게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도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시민권도 가질 수 있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이 얘기에 저는 대학교를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그 신학대학이라는 뜻이 미국 이라는 나라인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미국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솔직히 저는 꿈속에서도 그런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한 겁니다.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서 시간을 좀 달라고 했어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북한을 나와 2년 가까이 되는데 북한에서는 저의 행방도 모르고 굶어서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북한에 돌아간다고 해도 당시 중국에서 사는 상황보다 더 힘들 것 같았어요. 한편으로는 어차피 인생은 한번 사는 건데 한번 죽고 한번 사는 인생에 큰 모험을 해보고 싶어서 미국에 가겠다고 선택했어요.

미국행을 결심한 후 대니는 미국영사관으로 거처를 옮겼고 난민 신청을 하면서 여자 한명을 포함한 다른 탈북자 몇 명과 3개월 정도 지낸 후, 2007년 2월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 안에서 대니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 어려웠습니다. 한편, 함께 생활하던 탈북자들과 미국영사관 직원 한명은 로스앤젤레스까지는 같이 왔지만 그곳에서부터 정해진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헤어질 때 여자탈북자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부터 대니는 혼자 비행기를 갈아타고 유타 주(?)로 갔습니다. 주머니에는 대니가 공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온 사람들을 못 만날 것에 대비해, 대니가 어떤 사람이며 공항의 어디로 데려다주라는 내용이 적힌 영어쪽지가 들어있었는데, 염려한 대로 길을 잃었던 대니는 그 쪽지를 공항직원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미국인과 한국인 통역이 기다리는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대니는 유타 주에 도착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에는 시골도 없고 높은 건물만 있을 것으로 상상했던 대니에게 유타는 너무 촌 동네같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니는 호텔에서 일주일 정도 머문 후 한국인 가정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영어 학교에 다니며 미국 상점에 취직이 되어, 영어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부서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이 생겨서 직장에 못 나올 때에는 꼭 미리 연락을 해야 한다는 미국 법을 몰라 상점에서 잘리기도 했습니다.

일 년간 유타에서 지낸 후 대니는 큰 도시에서 살고 공부도 하고 싶어 로스앤젤레스로 옮겼습니다. 대니는 간호사나 의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는 범죄자를 쫓아다니고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들이 멋있어 보여 미국 연방수사대, 국제경찰, 범죄수사본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미국에 와서 가슴 아픈 북한 뉴스를 본 다음에 꿈을 바꾸었습니다.

CUT: 한국의 웹 사이트에서 북한 뉴스를 보게 되었는데 한 여성이 아기를 해산했는데 아기에게 먹일 우유가 없어서 잘 익지도 않은 옥수수 밭에서 생 옥수수를 훔쳐 먹다 밭은 지키던 경비원한테 잡혀서 맞았다는 뉴스였습니다. 아기엄마는 새 생명의 아기를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밖에서 뭐 훔쳐서라도 먹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모유를 주려고 하는데 그 경비원들은 그 엄마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사람을 구박하고 힘들게 하니까 새 생명이 햇빛도 못 보고 죽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전에 사춘기 때는 내가 앞으로 FBI, 미국 연방수사대나 INTER-POL, 국제경찰 그런 쪽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뉴스를 보고서 생각을 바꾸었어요.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저렇게 불쌍한 사람들의 아픔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으로 의사나 간호사를 하고 싶어요.

일본에 불어 닥친 강도 9.0의 초대형 지진과 쓰나미로 사망자와 실종자가 수 만 명에 달하고 있는 가운데, 로스앤젤레스 한인들도 피해 주민 돕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언론사들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이 일본 피해주민을 위한 성금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한인들은 한국을 식민지화 했던 과거사와 최근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일본에 감정이 있지만 그렇다고 대재앙으로 비탄과 고통에 빠진 이웃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은 미국전체가 불황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라 한인촌의 경제도 좋지 않죠.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의 일본 촌 주민들도 한인들의 모금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며 고마워합니다. 지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고 방사성 물질이 누출된 것에 대해서도 캘리포니아 일부 주민들은 일본 원자력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선 물질이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에까지 미칠 것이 염려되어 방사성물질이 몸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요오드화칼륨이라는 알약을 구입하고 있는데요, 전문가들은 요오드화칼륨 알약은 먹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사 조언 없이 먹으면 오히려 부작용 올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약품이 떨어진 약국이 많다고 하는군요.

LA 생생 뉴스 정현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