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 를 중심으로 서부 지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소식과 한인사회소식 등을 전해 드리는 LA 생생 뉴스 진행에 재미 언론인 정현숙 씨입니다.
음악: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전해드릴 소식입니다.
-- 한국전쟁이 발발 한지 61년, 그 오랜 세월을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온 이산가족들은 이제 고령이 되어 생전에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볼 수 있을 지 하루하루 안타깝습니다. 그런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사후에라고 북한의 가족들이 듣고 볼 수 있도록 영상편지로 만들고 있는 심향진 씨의 얘기 들어봅니다.
-- 한국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 입양된 혼혈 한인 여성과 그 여성이 만든 김치에 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화제입니다.
심향진 씨는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자입니다.
생존해 있는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사람의 영상편지라도 더 만들어 놓아야한다는 사명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영상편지는 남북으로 헤어져 언제 만날지 모르는 북의 가족에게, 죽은 후에라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테이프에 담아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산가족들이 영상편지를 주고받을 수는 없어 심 씨가 만든 수많은 영상편지는 북한의 가족들에게 보내질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한, 이산가족도 아닌 심 씨가 이산가족 영상편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직 한국에 있을 때인 2002년, 대한 적십자사의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 워크숍, 즉 제작 연수회 기사를 보고서였습니다.
심 씨는 예술가도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생각과 미디어 실기를 배울 기회라는 점에서 이 연수회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 초보적인 비디오 제작 기술을 배우고 2명씩 이산가족 명단을 받아 영상제작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소를 받고 보니 그들이 사는 곳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근처였습니다. 심 씨는 깜짝 놀람과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하는 자책감까지 생겨났습니다. 연수회는 한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연수회를 통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깨닫게 된 심 씨는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심 씨는 인터넷에 이산가족영상편지 제작에 관한 사연을 올리고 동참할 사람을 구했습니다. 방송사에서 근무하는 사람과 대학생 한명이 함께 일을 해보겠다고 왔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이 일에 매달렸습니다. 이산가족들의 안타까운, 구구절절한 사연은 한사람이 보통 1시간짜리 테이프 두서너 개, 어떤 경우는 한 분의 사연이 15개씩 되기도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피곤한 일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피곤했습니다.
평생 속으로 울면서, 아내,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눈물을 쏟는 그들을 영상에 담으며 함께 울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사연을 안고 반백년 넘는 세월을 가족과 헤어져 사는 이산가족들의 우체부가 되자는 생각으로 이들은 2008년 심 씨가 미국에 올 때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 힘든 일을 계속했습니다. 현재 오렌지 군에 거주하고 있는 심 씨는 한 미국인에게 테이프을 보여주었는데,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그 사람도 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에는 당연히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미국에 온 후 심 씨는 일단 돈부터 벌기위해 영상편지 제작을 중단했었으나 이제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심 씨는 최근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한국일보에 '누구를 위한 이산가족 상봉인가'라는 주제로 글을 썼는데 그 일부 내용을 이원희 기자가 소개합니다.
'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61년이 흘렀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아픔은 아직도 도처에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가족과 헤어져 반백년 넘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한국 전쟁 당시 그분들은 젊은이들이었고 갓 결혼을 하였거나 미혼으로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부모님의 권유에 의해 남쪽으로 잠시 피했다가 귀향할 생각으로 온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오지 않았다고 그분들은 말씀하신다. 기나긴 세월동안 북의 가족을 그리워하다 끝내 기억상실증에 걸리신 분, 고향 장단 역을 그리며 중풍 맞은 몸으로 서대문 집에서 걸어걸어 서울역을 찾아 서성이시던 분 등 사연도 가지가지이다.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전체 12만 8천 여 명 가운데 생존자는 8만 2천 여 명이며 사망자는 4만 6천명이라고 한다. 생존자는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고령자로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한시라도 바삐 모든 남북이산가족들이 가족의 생사를 알고, 또 지속적으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한다. 아울러 생존해 있는 이산 1세대의 영상편지를 잘 정리해 놓아야한다. 그래야 작고한 후에라도 북의 가족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자녀를 북에 두고 온 경우, 그들은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북의 자녀를 상봉하신 분에게 실제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길고 긴 세월, 무거운 침묵 속에 크고 작은 여러 형태의 오해가 있었다면 영상편지를 통해 그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얼마나 북의 가족을 그리워했는지 영상편지를 통해 그 절절한 사랑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영상편지는 차후에 남북 이산 2,3세대와의 만남의 가교 역할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이산가족들의 영상편지를 제작하여 그 사연을 알리고 이미 제작해 놓은 영상편지도 알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그러나 밀착 취재를 하는 우리로서는 아무리 열심히 제작을 하여도 생존한 모든 이산가족의 영상편지를 제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분이라도 더 돌아가시기 전에 정부차원에서 보다 밀착된 영상을 담은 이산 1세대 영상편지 제작을 재개해주기를 기대한다.'
브릿지 음악: 음악과 함께 " 여러분께서는 자유아시아 방송에서 보내드리는 엘 에이 생생 뉴스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요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한국인과 흑인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 입양된 혼혈여성과 김치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입니다. 혼혈 한인인 마르자 봉게리히텐 씨가 제작한 '김치 연대기'라는 tv 프로그램이 이곳 미국 공영방송에서 13회에 걸쳐 방송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치 이야기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tv 방송에 나온 것도 처음인데다 마르자씨의 지금까지의 삶 또한 한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이어서, tv 방영을 앞두고 한인촌에서는 마르자씨의 강연회, 방송 제작 발표회, 방송 축하 파티 등이 연이어 열렸습니다.
마르자씨는 3살 때 미국에 입양되어 캘리포니아의 정반대인 미국의 동부, 버지니아 주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양부모는 좋은 사람들이어서 언젠가는 마르자씨의 생모를 찾아주기 위해 생모의 사진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으며, 드디어 그들의 노력 끝에 지난 95년에 생모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꼭 만나게 될 운명이었는지 생모를 찾고 보니 생모도 미국, 그것도 버지니아 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뉴욕 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자씨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남북의 이산가족들도 이렇게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쨌든 생모를 만난 마르자씨는 그때부터 해마다 생모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유명 요리사인 남편을 만나게 되고 김치에 관한 tv 방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방송은 김치를 비롯한 한국음식 소개와 함께 중간 중간 마르자씨가 어렸을 때 가졌던 한국에 대한 기억, 사랑 등이 들어가 한국의 다른 문화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이 금년 6개월간 처리한 민원업무를 집계해 본 결과, 젊은이들은 한국 국적을 버리려고 하는 반면 노인들은 한국국적을 회복하려는 문의가 부쩍 늘었습니다. 이는 젊은이들의 경우 잘못하다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병역의무를 지게 될까봐 두려운 반면 노인들은 최근 한국정부가 65세 이상 고령의 동포들에게 복수국적을 허용함에 따라 미국시민권을 잃지 않고도 한국에 가서 지하철을 무료 승차 하는 등 다른 한국 노인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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