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언론의 겉과 속] 중국의 위대한 ‘작은 거인’ 등소평

등샤오핑의 초상화가 그려진 대형 간판 밑을 지나고 있는 중국인들.
등샤오핑의 초상화가 그려진 대형 간판 밑을 지나고 있는 중국인들. (AFP PHOTO/Philippe Lopez)

0:00 / 0:00

북한 선전매체의 진상을 뒤집어 보는 '북한 언론의 겉과 속' 시간입니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생일이 다가오면서 북한에서는 정치행사 준비로 떠들썩합니다. 그런가 하면 2월 19일은 중국의 위대한 지도자, 등소평이 사망한 날입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생일준비를 하느라 들볶이고 있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13억 인민을 잘 살게 해준 등소평에 대한 우상화 행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간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총설계자 등소평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일생을 돌이켜보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을 '광명설절'로 정하고, 행사 분위기를 띄우고 있습니다.

<녹취: 북한 TV> "뜻깊은 광명설절을 맞아 백두산밀영고향집에는 수만 명의 청년학생들이 찾았습니다. 시민의 반응: 언제나 인민들에게 사랑을 안겨주시려고 한생을 깡그리 바치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수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밀영 고향집'을 답사하고,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도 김정일화를 피워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훈장, 김정일 상을 제정하고, 동상까지 만들어 주민들에게 충성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김 전 위원장의 생일을 그의 생전보다 더 크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특히 권력기반이 약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아버지의 생일축제를 크게 해서 주민들을 결속을 꾀하려 한다고 한국 언론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에서는 김 위원장 생일 분위기가 고조에 달할 때, 압록강 건너 중국에선 등소평 서거 15주년을 차분하게 맞고 있습니다.

그러면 등소평은 어떤 사람일까요?

청취자 여러분은 등소평 하면, 키가 작은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1983년에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보다 작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녹취: 북한TV>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이신 김정일 동지께서는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임이신 등소평 동지와 상봉하시였습니다.>

하지만, 이 158cm의 작달막한 지도자가 중국을 변화시킨 주역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작은 거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모택동에게 3번 숙청당했다가 3번 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오늘의 부강한 중국을 만들었으니까요,

등소평은 1904년 중국 사천성 광안현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에 프랑스로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서 칼 맑스 사상을 접하고, 자본주의를 경험합니다.

등소평은 프랑스에서 트랙터(북한표현, 뜨락또르)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를 묘리를 터득했고, 귀국해서는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해 모택동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팔로군에 입대하여 군사정치 지휘관으로, 2만5천리 대장정에도 참가합니다. 1949년에는 장개석 국민당 정부를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데도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등소평은 해방 후 중국 공산당의 핵심 간부로 사업하면서 모택동과 노선상 문제로 마찰을 빚게 되는데, 이 때문에 수정주의자, 자본주의자로 몰려 3차례에 거쳐 혁명화를 당하는 수모를 당합니다.

특히 문화대혁명 때에는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지에서 3년 동안 갇혀 살았고, 등소평의 아들은 홍위병들의 고문에 시달리다 못해 창문에서 뛰어내려 불구가 되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극적으로 기회가 찾아온 것은 모택동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역사의 심판을 받은 뒤였습니다. 중앙의 권력을 장악한 등소평은 개혁개방 노선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등소평의 연설을 들어보시겠습니다.

<녹취: 등소평 육성> "총체적으로 말하면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며 우리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인민이 하루 빨리 일어서겠는가, 국가가 일어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등소평은 1978년 개혁개방 노선을 제시한 뒤, 경제 분야의 인재들을 거느리고 미국과 일본 등 서방 국가들을 방문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한 말 중에 "흑묘백묘론"이 유명합니다.

풀어 말하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말인데요, 자본주의 방식이든 사회주의 방식이든 인민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면 좋다는 뜻입니다.

서방국가들을 방문하는 과정에 등소평의 주된 관심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어떻게 하면 중국실정에 접목시키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등소평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키가 작은 등소평은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만났을 때 "왜 자신을 보지 않느냐?"는 질문에 "너는 왜 나를 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작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12억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지킨 셈입니다.

당시 북한은 등소평의 개혁개방 노선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했습니다. 북한 주민들 속에서는 "등소평이 미국에 가서 매춘부에게 놀아났다"는 비난이 돌기도 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기억하겠지만, 당시 북한은 중국보다 잘 살았습니다. 북한에 나와 살던 중국화교들은 석탄덩이를 주우러 다니고, 물감장사를 하면서 겨우 살던 시기였습니다.

등소평은 당시 개혁개방 논리에 대해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정확하지 않다.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완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녹취: 등소평 연설> "우리의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은 반드시 중국의 현실에서 출발하여야 하며 맑스주의 보편적 진리와 우리나라의 구체적인 실정에 맞아야 합니다. 자기의 길을 가야하며, 중국의 특색 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합니다"

등소평은 중국의 경제발전 전략을 3가지로 정했습니다.

첫째 단계는 인민들이 먹고 입는 문제를 초보적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이미 이 단계를 실현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입니다. 샤오캉 사회란 주민들이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안정된 사회, 즉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중산층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 경제성장률이 매해 10%대를 유지해 지난해 말에는 국내총생산(GDP)이 6조5천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세계 경제 2위로 올라섰습니다.

지난해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0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1978년 개방 당시 국민 소득이 100달러에 불과했던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이 30년 만에 50배 성장한 셈입니다. 이에 비해 북한주민의 1인당 국민소득은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250~300달러에 달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중국의 현대화 사회 건설입니다. 이 단계는 일단 경제부흥을 이룬 다음에는 물질적 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등소평은 "만약 많은 재산을 소수만이 누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누리지 못한다면, 사회가 분열되고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19세기에 가난한 무산계급이 자본가들을 반대해 들고 일어났듯이, 중국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지면, 제2의 무산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 셈입니다.

앞으로 중국에서는 사회 양극화를 없애는 문제가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등소평은 마무리를 깨끗하게 해서 다시 한 번 천재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자,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1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1982년에 중국 공산당 내에 당중앙 고문위원회를 만들고 후배양성에 공을 기울였습니다.

결과 강택민 주석이 1989년에 국가주석직에 올랐고, 2002년에는 호금도 주석이 뒤를 이었습니다. 오는 2012년에는 습근평 부주석이 당총서기직에 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의 중앙영도집단을 10년 주기로 바뀌게 만든 것도 등소평의 공이라 하겠습니다. 등소평은 모택동처럼 늙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또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택동의 업적을 전면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등소평은 모택동의 업적을 "공적이 70%, 과오는 30%이며, 전반 20년은 좋았으나, 후반 20년은 과오가 많았다"고 재평가했습니다.

지금도 중국 돈의 100원짜리 지폐와 50원짜리, 20원짜리, 10원짜리 지폐에도 모택동의 초상이 새겨져있습니다. 등소평은 자신이 죽은 다음에 화장하라고 유언했고, 실제로 그의 유해는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습니다.

13억 중국인민을 먹여 살린 등소평, 그는 중국 땅에 시장경제를 이식했지만, 위대한 사회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부유한 나라의 공민이면 충분하다. 공산주의 이상은 위대하고, 사회주의는 경애로 우며, 사회주의를 위해 한평생 투쟁하는 것은 값어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떠날 때를 아는 지도자" 등소평.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중국인들이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해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두 수령인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근 50년 동안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고 공약했지만,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북한 인민들은 그런 사람들의 동상을 만든다, 엄동설한에 꽃을 피운다 하면서 고생만 하고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