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선전매체의 이모저모를 다시 뒤집어 보는 북한 언론 뒤집어보기 최민석입니다.
오늘도 정영기자와 함께 합니다. 정영기자, 오늘 북한언론 뒤집어보기 주제는 무엇입니까,
정영: 요즘 북한 선전 매체에는 지난 15일 타계한 노로돔 시하누크 친왕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대외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노로돔 시하누크의 영전에 화환을 보냈다는 기사가 실렸고, 또 북한 전역에 노로돔 시하누크를 애도하는 조기를 띄우도록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간에는 노로돔 시하누크와 북한의 김 씨 일가 사이의 각별한 관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으로 마련했습니다.
최민석: 노로돔 시하누크라고 하면, 외부 사회에서는 동남아의 ‘정치풍운아’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로 알려졌는데요, 먼저 노로돔 시하누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북한 주민들이 궁금해할 것 같은데요?
정영: 노로돔 시하누크는 북한 주민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 노동신문에 많이 소개됐는데요, 그가 순안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사진을 볼 때마다 북한 주민들 속에서 이런 말이 돌았는데요, 누가 “오늘 노로돔이 온대” 하고 말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시하누크도 같이 왔겠구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북한 주민들이 노로돔이 너무 자주 와서 놀음 삼아 지어낸 말인데요, 어떤 주민들은 진짜 노로돔과 시하누크를 부부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길래, 명칭이 왕인데 자기 나라에 있지 않고 외국에 자주 나올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최민석: 그랬던 노로돔 시하누크가 지난 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노로돔을 추모해서 조기를 띄우고, 김정은 명의로 조전도 보냈는데요, 둘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까,
정영: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노로돔 시하누크가 사망하자 바로 조전을 보냈는데요, 아마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내려오는 끈끈한 관계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김일성 전 주석이 시하누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65년입니다. 김일성은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열린 쁠럭불가담(비동맹)회의에 가서 노로돔을 처음 만났고, 거기서 노로돔 시하누크가 북한을 적극 지지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시하누크와 김일성은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는데요, 23일 우리민족끼리 기사에도 이런 기사가 있네요. “왜 시하누크를 북한에 자주 초청하는가” 하는 외국인들의 질문에 김일성은 “나와 친왕은 형제 사이 관계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최민석: 노로돔 시하누크는 캄보디아의 왕족 집안에서 출생해서 일생을 왕으로 살아온 세습왕자이지요,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왕족 체제를 반대하는 국가가 아닌가요? 뭐가 좀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
정영: 노로돔 시하누크는 1922년에 캄보디아 왕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세에 캄보디아 왕국 국왕으로 올라 최연소 왕이라는 별호를 얻었는데요,
18세부터 2004년까지 명목상으로 캄보쟈의 국왕으로 있었습니다. 1970년에는 캄보디아에서 군사정변이 일어나 왕위를 박탈한 적도 있습니다. 그 다음 시하누크가 해외로 쫓겨난 다음 참 고단한 생활을 했는데요, 그때 시하누크를 받아준 사람이 바로 중국의 주은래 총리와 북한의 김일성이었습니다.
그런데 1976년에 저언라이 총리가 사망하자, 시하누크는 더 자주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인사법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요, 그가 김일성을 만날 때마다 항상 두 손을 마주 올리고 고개를 조아리곤 했습니다.
그걸 이해 못하는 북한 사람들은 남자가 “너무 삽삽하다” 그러니까 “너무 가볍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하누크가 망명생활을 할 때 김일성은 평양에 ‘장수원’이라는 궁전을 지어주었고, 시하누크는 중국과 북한을 오가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북한 매체에도 그가 왕으로 있을 때는 노동신문 1면에 나오다가, 그가 망명생활을 할 때는 노동신문 2면이나 3면에 조그마하게 실리더라고요.
최민석: 북한 매체의 글을 보니 “노로돔 시하누크 대왕은 인류 자주 위업 실현에 커다란 업적을 쌓은 저명한 국제정치 활동가”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외부에서 보는 시하누크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정영: 시하누크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캄보디아를 독립하는 데 일조했고, 또 쁠럭불가담(비동맹) 운동을 제창한 선두자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과 통하기 때문에 지금도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하누크도 왕족 집안인 만큼 사치스런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요, 전 생애에 6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거기서 아들만 해도 14명을 두었다고 합니다. 노로돔 시하누크가 지금 부인을 맞던 때의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그는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섰던 미인대회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아내로 골랐다고 합니다.
최민석: 그렇군요, 그런 이유로 북한 김정은 정권도 시하누크가 사망한 다음에도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진행하는 북한언론 뒤집어보기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최민석: 자 이젠 주제를 바꿔 보겠습니다. 현재 평양에서 한참 공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군대의 힘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만경대 유희장 근처에 있는 야산을 번듯하게 밀어내고 배구장을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게 기계가 좀 동원된 것입니까, 아니면 순수 사람의 힘으로 한 것입니까?
정영: 지금 만경대 유희장 관련 동영상이 해외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데요, 거기에는 “만경대 유희장 준공을 앞두고 군인들이 불과 10일 만에 야산을 통째로 들어내고 거기에 배구장과 롱구장을 건설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직접 한번 보시겠습니다.
녹취/북한 유원지 관리 총국장: “단 10일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여기 산을 모두 깎아내서 들어내고 번듯하게 농구장을 건설했습니다”
북한 매체에 소개된 내용을 보니까, 그 처리된 야산의 토량만 해도 1만 입방이 넘는다고 합니다. 1만 입방이면 흙이 1만톤이 넘는다는 소린데, 암반을 해머와 정대로 까내고, 순수 군인들이 등짐과 맞들이로 날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낮과 밤이 따로 없이 결사전을 들이댔다고 북한 매체가 보도했습니다. 그게 말이 쉽지 군인들의 수고가 정말 큰 것 같습니다.
최민석: 이거 지도자가 너무 젊어서 그런지 모든 일을 빨리 빨리 하라고 다그치는 것 같은데, 그 통에 군대들만 죽어나는 것 같은데 이렇게 건설해놓으면 누가 혜택을 보는지요?
정영: 군대들이 중장비 없이 맨손으로 건설도 하고 등짐으로 흙을 날라 지어 만들어 놓으면 평양시 특권층만 이용하게 되어있습니다.
현재 건설되고 있는 대규모 공사들이 모두 평양시에만 집중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지방 인민들은 평양에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김정은의 ‘인민사랑’이란 구호 뒤에서 인민군대만 죽도록 고생하고 있는 셈입니다.
최민석: 정작 김정은이 ‘인민의 부귀영화’라고 말해놓은 것도 평양시민에게만 베풀고 있는데요, 지금 이 시각도 자녀를 군대에 내보낸 부모들의 마음 고생도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정영기자, 오늘 북한언론 뒤집어보기 잘 들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다음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