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선전매체의 진상을 알아보는 북한 언론의 겉과 속 시간입니다. 북한이 1967년에 반동으로 몰려 숙청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생일 100돌을 맞아 그를 대대적으로 띄웠습니다.
북한 중앙텔레비전은 최승희 선생이 “백두산 위인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 세계적인 무용가의 삶을 살았다”고 보도했지만, 정작 그가 숙청당한 사실이나, 파란 많은 인생역정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간에는 북한 매체가 전하지 않은 최승희 선생의 곡절 많은 인생을 그의 제자로 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11월 24일은 고 최승희 선생의 생일 100돌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북한 중앙텔레비전은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최승희 선생의 묘소를 소개했습니다.
<녹취: 조선중앙TV> “애국열사릉에 있는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묘소에 그의 생일 100돌을 맞으며 24일 화환이 진정됐습니다. 여기에는 관계부분 일군들과 무용예술부분 일꾼들, 최승희 선생 유가족과……”
신미리 열사릉에 안치된 최승희선생의 묘비에는 생일은 1911년 11월 24일로 되어 있고, 사망 날짜는 1969년 8월 8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서울시 종로구에서 태어나 숙명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용계에 샛별로 떠오르던 최승희가 어떻게 되어 북한에 묻히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최승희 선생의 무용제자 탈북자 김영순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김영순: “말하자면 해방 후 북한에서 예술인 대우가 좋다고 해서 남한에 있던 예술인들이 많이 갔지 않아요? 최승희 선생도 1946년 인천에서 배를 타고 월북을 했거든요. 김일성은 최승희를 만나고 대동강반에 무용연구소를 꾸려주었어요. 옥류관 옆에 백 과부(?)네 집 옆에 연구소를 꾸려주었어요. 그랬는데, 원래 ‘최승희 무용연구소’였던 것이 1953년에 국립무용극장으로 개칭을 했어요… ”
2003년 북한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김영순 씨는 올해 나이 74세로, 북한에 있을 당시 최승희 선생으로부터 무용기법을 전수받은 제자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1967년 최승희가 숙청당하던 당시 상황을 지켜봤던 몇 명 안 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최승희 선생은 북한에 올라가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 공훈배우와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최승희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67년 가을. 평양시 무용극단에서 벌어졌던 사상투쟁의 자리였다고 김영순 씨는 말합니다.
김영순: “그때 조선인민군협주단 무용배우들과 국립연극단 무용배우들이 모였는데, 우리는 그 장소에서 얼굴도 못 들었어요. 너무나도 당황하고 너무 기가 막혀서, 도대체 최승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저렇게 비판을 받는지, 놀랐어요.
그때 중앙당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가 거기 나와 가지고 회의를 집행했어요. 그도 역시 후에 목이 달아난(숙청된) 사람이에요. 그때 주석단에 앉은 사람이 김창만, 안막, 최승희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안막은 문화상을 지냈는데, 회의 안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어요. 원래 북한은 그런 숙청을 할 때는 잘 밝히지 않지 않나요.
단지 김창만이가 ‘사도성의 이야기’에서 왜 중(스님)을 많이 등장시켰는가’ 물어봅디다. 그리고 최승희의 제자인 남자 무용수 오몽희를 일으켜 세우고 ‘당신 어떻게 된 거냐, 말 좀 해보라우’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러자, 오몽희가 ‘최승희 선생이 무대 출현 한지 30년이 되는 것과 관련해 닭 30마리를 털을 다 뽑아서 잡아 드렸다’고 하니까, ‘당신 그거 보라, 그게 바로 자본주의 뇌물작전이고, 간부들에 대한 아부아첨이다’고 하면서 몰아댔어요. 오몽희는 얼굴이 새빨개서 말을 못했어요. 그 다음에 최승희 얼굴을 못 봤어요. 1967년 가을에 무대를 떠났으니까……”
당시 북한에서 인기를 끌었던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에 의해 창작됐습니다. 이 무용극에는 정치적인 색체가 없었고, 단지 우리 민족의 삶을 춤으로 형상한 것이었다고 김씨는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당대 사회현실을 반영해 절간의 스님을 여러 명 등장시킨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김씨는 말합니다.
김영순: “사도성의 이야기는 어쨌든 사도성을 중심으로 해서 국민들의 삶을 노래한 것이지요. 즐거운 춤가락이지요. 거기에 중이, 스님들이 염주를 굴리면서 성을 한 바퀴 도는 게 있어요. 그것 때문에 좀 두들겨 맞았지요.”
이렇듯 ‘사도성 이야기’는 최승희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됐습니다. 최승희 선생은 그 뒤로 무대를 떠났고, 2년 뒤인 196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영순씨는 평양에 거주하는 동안 북한 예술계에서는 최승희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다고 말했습니다.
김영순: “제가 1967년부터 70년 사이에 평양에 있을 때, 우리끼리 최승희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했는데, 쉬쉬한 소문이 많이 돌았어요. ‘최승희가 우유에다 목욕을 한대’, ‘최승희가 진주목걸이 한 단지가 있대’, ‘야, 최승희가 몸종 두고 있대’, ‘최승희가 스위스에 계좌를 가지고 있는데, 돈이 많대’ 이런 소리를 하더라고요. 이런 유언비어가 배우들 속에서 돌았어요. 최승희에 대해 궁금하지 않겠어요.”
북한에서 반당 종파분자로 숙청당한 사람에 대한 유언비어는 언제나 야박했습니다. 언론이 자유롭지 못한 북한에서 주민들은 사실을 알 길이 없고, 그냥 누군가가 퍼뜨린 소문이나 듣고 아는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쉬쉬한 소문이 돌던 와중에 김씨가 최승희의 사망 소식을 접한 것은 그 이듬해.
김영순: “1969년도 59세에 돌아갔어요. 67년도 57세에 무대를 떠났고, 59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정치범 수용소에 갔던 재일 북송교포들의 말에 따르면 최승희가 어느 광산에서 데모하다가 총살당했다는 소리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최승희가 어떻게 수용소에서 살겠나, 죽었대, 너무 힘들어 죽었겠지 뭐,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러면 북한은 최승희를 왜 숙청했을까요?
최승희가 숙청당한 시기는 북한이 문화예술분야에서 복고주의와 봉건주의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한 일대 숙청과 단속을 강화했던 시기와 동일합니다.
북한은 1967년 5월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비서 박금철과 대남담당 비서 리효순 등 갑산파들을 반당·종파분자로 숙청하면서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수립합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 당안에 기어든 반당 종파분자들이 문학예술분야에 자본주의 잔재와 유교 복고주의를 퍼트렸다”고 주장하던 시기였습니다.
더욱이 김정일은 노동당 선전선동부에 들어가 문화예술 부문을 지도하면서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닦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남한에서 올라갔던 문화예술인들도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김영순: “남한에서 올라간 예술인들이 많이 숙청되었습니다. 조상선, 안기옥, 공기남도 ‘춘향전’ ‘심청전’도 모두 그들의 창작품인데, 그런데 70년대 안기옥이도 모두 무대를 떠났고, 그들의 운명이 다 좋지 않아요.”
결국 공산주의에 환심을 가지고 북한에 올라갔던 한국의 이름 있는 예술인들이 계급독재의 칼을 맞았습니다. 최승희도 이 숙청의 칼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는 지적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번에 최승희의 복권을 기리는 의미에서 ‘사도성의 이야기’를 다시 각색해 무대에 올렸습니다.
<녹취: 북한TV> “무용가 최승희 생일 100돌을 맞이하여 선생이 창작한 ‘사도성의 이야기가 26일 평양 대극장에서 진행됐습니다. 백두산 위인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 조선민족 무용발전사와 세계 문예사에 뚜렷한 자국을 남긴 최승희 선생이 50년 전에 창작한 ‘사도성 이야기’는 3국시기 사도성 인민들이 열렬한 애국심과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왜적을 반대하여 싸운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를 파멸시킨 작품인 동시에 다시 그를 복권시킨 역설적인 작품이 됐습니다.
그러면 최승희가 어떻게 다시 북한에서 복권되었을까,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고 김일성주석이 사망하기 전에 쓴 회고록이 한몫했습니다.
김영순: “김일성 회고록 5권에서는 최승희가 조선무용가동맹 위원장으로서 조선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고, 우리 민족 무용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썼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이 나가자 북한에서는 최승희를 복권시키기 위한 움직임들이 활발해졌습니다. 2003년에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최승희의 묘비가 세워지고, 그를 기리는 책도 발간됐습니다.
북한 무용계 간부들도 “최승희 선생은 우리의 춤가락들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데 온갖 정열과 피타는 노력을 쏟아 부은 열정가, 일제식민지 통치에서도 민족무용을 발전시킨 선각자"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북한 매체들은 “최승희 선생은 백두산 위인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 조선민족무용발전사와 세계문예사에 뚜렷한 자국을 남겼다"고 아전인수식 평가를 했습니다. 하지만, 김영순씨는 “최승희는 북한에 속아 월북했지만, 결코 작품에 붉은 사상이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김영순: “최승희 선생님은 중국 창극을 많이 개발시켰고, 인도무희, 석굴암의 보살, 장고춤, 부채춤 등 우리 기본을 만드셨고, 조선을 빛내 이고자 실천적인 춤사위로 세계무대를 휘어잡은 무희이거든요. 춤에 무슨 빨간 사상이 있습니까, 춤가락에 팔다리 움직이는데 무슨 빨간 사상이 묻어나요?”
그는 최승희 선생과 같은 세계적인 인재가 너무 빨리 빛을 잃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현재 남한에서 ‘최승희 무용연구원장’을 지내며 남한 제자들에게 최승희의 춤가락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그는 “최승희의 춤가락을 한국의 디지털 기술과 잘 접목시키면 한국이 세계무용계를 석권할 수 있다”며 “한국에서 최승희 복권에 앞장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