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북한에 계시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 주간 북한 선전매체의 보도를 다시 한번 뒤집어보는 ‘북한언론의 겉과 속’ 시간입니다. 오늘 진행을 맡은 최민석 입니다. 오늘도 정영기자와 함께 합니다. 정영기자,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무엇입니까?
정영: 지난 25일 쿠바를 반세기 동안 통치했던 최장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루스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90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평양 주재 쿠바 대사관을 찾아가 조의를 표하고, 최룡해를 단장으로 하는 고위급 대표단을 쿠바에 파견하는 등 최대 성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독한 반미주의자였던 피델의 사망은 북한에 있어 반미동지를 잃은 셈이 되겠지만, 쿠바사람들에게는 고립과 폐쇄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간에는 북한이 보도하지 않은 피델의 뒷 이야기, 그리고 김씨 정권과 무엇이 다른 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최민석: 네, 반세기 이상 쿠바를 통치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북한으로 치면 김일성 주석과 비슷한 위치였으니, 그를 추모하는 쿠바의 분위기도 대단할 것 같습니다.
정영: 그렇습니다. 지난 26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자신의 형인 피델 카스트로가 25일 밤 10시29분에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습니다. 피델의 유골은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될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는 현재 금수산 기념궁전에 미라로 보관된 김일성 김정일 시신보관방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피델의 추모식이 열린 29일까지 수도 아바나의 추모 열기가 달아올랐다고 외신들은 전했습니다. 현지 외신들에 따르면 식당과 호텔 등에서는 노래소리가 사라지고, 술을 팔지 않는 등 절제됐으며, 아바나 종합대학 학생들은 ‘혁명의 대선배’였던 피델을 기리며 애석해 했다고 전해졌습니다.
또 아바나에는 미국인 관광객들도 적지 않았는데요, 그들은 아바나 시민들과 함께 거리를 거닐면서 ‘피델은 정치적으로 나쁜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를 떠나서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쿠바인들의 추모열기를 전했습니다.
최민석:피델을 추모하는 아바나 거리에 미국인 관광객들이 적지 않다는 게 놀랍군요. 북한에서도 추모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은데요.
정영: 북한 노동신문은 28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평양주재 쿠바 대사관을 찾아 “위대한 동지, 위대한 전우를 잃은 아픔을 안고”라는 글을 조의록에 남겼다고 29일자로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 고위급 간부들이 쿠바 대사관을 찾아갔고,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이 아바나로 출발했다고 전했습니다.
평양에 지국을 둔 AFP통신은 북한 주민들이 피델 카스트로를 ‘가까운 친구’로 기억하고있다고 전했고, 역시 지국을 두고 있는 AP통신도 북한은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둔 동지로 여기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은 3일 동안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북한 전역에 조기를 걸도록 조치했는데요. 이 때문에 평양 곳곳에 걸린 공화국기(인공기)는 기발대에서 조금 내려져서 걸려 있습니다.
북한이 이처럼 외국인 지도자의 사망에 최고의 예의를 갖춘 것은 과거 중국의 모택동이나 주은래 사망과 같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물론 김일성 김정일 사망 추모행사는 근 1주일 이상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피델 애도기간을 3일로 정한 것은 그 만큼 혈맹관계로 간주하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최민석: 북한 청취자 분들도 피델 카스트로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것 같은데요, 설명 좀 해주시죠.
정영: 피델 카스트로에 대해 북한이 원론적으로 알려주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않지요. 그는 1926년 생으로, 올해가 90세였습니다. 그는 쿠바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바나 종합대학에서 법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다가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1952년 쿠바의 바티스타 정부를 반대해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거기서 실패하고 15년형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자체 변호를 했는데요, 그때 “역사가 나를 무죄로 선포할 것”이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후 1955년 특사를 받아 풀려나 멕시코로 망명했습니다. 북한같으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서 처단됐을 상황이었지만, 바티스타 정부가 크게 관용을 베푼겁니다.
그 다음 피델은 1956년 말에 82명의 동지들과 함께 ‘그란마’라는 배를 타고 쿠바로 상륙했습니다. 3년 뒤인 1959년에 혁명에서 승리하고 쿠바의 최고 권력자로 되었습니다. 피델의 키가 191cm의 장신의 혁명가인데, 그는 일생을 군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는1959년부터 2011년까지 약 52년 간 쿠바를 통치해서 ‘세계 최장수 독재자’라는 기록을 세계 기네스 북에 남겼습니다.
그동안 그는 반미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소련 등 공산권의 지지를 받았는데요.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638차례의 암살 위협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기적적으로 암살을 피했는데요. 심지어 그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접근했던 내연녀가 피델에게 반해서 결정적 순간에 권총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최민석: 이일화는 너무 많이 알려졌지요.
정영: 그러나 북한 주민들에게는 이러한 부분까지는 보도하지 않아서 새로운 소리가 되겠지요. 그는 장출혈 등으로2006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었고, 2008년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물러났습니다.
최민석: 피델이 대단한 것은 그가 죽기 전에 어느 정도 자기 손으로 해결했다는 점입니다.
정영: 소련에게 붙었다가 소련이 90년대 초에 망하지 않았습니까, 피델은 이걸 간파하고 나라 문을 어느 정도 열었습니다. 일부 경제 개방과 개혁을 해서 북한만큼 수백만명이 굶어죽는 대 참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탈북자와 같은 쿠바 망명자들이 보내오는 돈도 받아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지금은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이 들어가 활동하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아주 나빠지리라고 전망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피델이 사망했으니 쿠바 사람들은 이제부터 변화를 상상하지 않을까, 근 반세기 이상 빈곤과 가난의 질곡에서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이제 30살에 불과한 김정은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앞으로 그가 사라질 때까지 어떻게 몇십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의 마음이 씁쓸할 것으로 보입니다.
최민석: 그렇습니다.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은 피델은 쿠바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지도자로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에게는 그 바램마저 사치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정영기자, 수고했습니다.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