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한반도] 박남기는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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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사진단 한반도>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박성우입니다. 북한이 화폐개혁의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과 함께 화폐개혁 이후 북한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서 진단해 보겠습니다.

박성우:

위원님, 지난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고영환:

네, 잘 지냈습니다.

박성우:

지난해 11월30일 화폐개혁 이후로 북한이 극심한 물가 인상을 겪고 있는데요. ‘북한이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서 노동당의 계획재정부장인 박남기를 해임한 걸로 알려졌다’고 언론들이 3일 보도하기도 했는데요. 물론 북한이 이걸 공식 확인한 건 아닙니다만,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정황이 여러 가지 있지요?

고영환:

북한은 일반적으로 소식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보는 건 공식 출판물에 나오는 자료들이죠. 이걸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은 1928년생이니까 지금 82세입니다. 이 사람은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체코 프라하에 가서 공부하고 들어와서, 북한 경제의 가장 중요한 간부로서 당중앙위원회 중공업 담당 비서도 하고, 경공업 담당 비서도 하고,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도 하고, 평양시 행정경제 위원장도 하고, 당 계획재정부장도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사상 분야에 황장엽 비서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경제 분야에는 박남기 부장처럼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계획경제의 어떤 대가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박남기 부장은 지난해 김정일 위원장의 현지 시찰에 123회가량 동행했어요. 그런데 올해 1월9일 김책제철연합기업소 행사에 나온 게 보도된 다음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박남기 부장이 해임된 걸로 외부에서 추측할 수 있는 거지요. 거의 확실한 걸로 볼 수 있습니다.

박성우

: 정황을 볼 때 확실해 보인다는 거네요. 그리고 이 사람을 해임한 이유는 뭐라고 분석하십니까?

고영환

: 지난해 11월30일 화폐개혁을 해서 1대100으로 바꿨고, 외화사용 금지에 대한 인민보안성 포고문이 나왔고, 시장을 폐쇄할 때에 대한 지시문이 하달됐죠. 그러면서 임금이 거의 100배 올랐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좋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화폐개혁이라는 건 시작하기 전에 치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시장에 물자가 충분히 돌고, 생산도 잘 받침이 되고, 유통도 준비가 된 상황에서 화폐개혁을 해야 성공하는데요. 그런데 상품이 없고 국가 경제는 돌아가지 않는데 시장까지 막아놓고 화폐개혁을 해 버리니까, 처음에 20원 하던 쌀값이 300원이더니 지금은 600원까지 올라간 거지요. 그리고 달러 가치가 1달러에 30원이었는데, 지금 공식환율은 100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공식 환율은 지금 신의주 같은 곳에서는 500원-600원인데, 좀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800원까지 한다고 하거든요. 한 달도 못 되는 사이에 거의 30배 물가가 폭등하고, 달러 값이 폭등한 셈이지요. 매일 물건값이 올라가니까 상인들이 물건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지요. 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이걸 바꾸려고 하지 않고요. 시장경제로 조금 지탱되면서 가던 경제 자체가 멎어버리게 되니까, 그 책임을 질 사람이 하나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박남기 부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난 걸로 보입니다.


박성우

: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다는 말씀이신데요. 과거에도 이런 전례가 있었지요?

고영환

: 1997년 당시 서관히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가 그렇지요. 이 사람은 굉장한 농업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잖아요. 그 책임을 서관히 비서가 다 뒤집어쓰고 ‘미제의 고용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총살됐습니다. 이번 화폐개혁도 김정은 후계자와 장성택 부장, 박남기 부장, 이렇게 3명이 주축이 돼서 했다는 말이 있는데요. 후계자에게 책임을 지울 수도 없고, 김정일 위원장의 친척인 장성택 부장에게도 책임을 지울 수 없고, 그러니까 결국은 박남기 부장이 희생양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박성우

: 알겠습니다. 어쨌든 북한의 경제가 좋지 못해서 발생하는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노동신문 1일자 보도인데요. “아직 우리 인민들이 강냉이밥을 먹고 있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다”고 김정일 위원장이 말했다는 내용입니다. ‘김 위원장이 나름대로 솔직하게 경제난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김 위원장의 고백은 여전히 솔직하지 않다. 강냉이밥이라도 배불리 먹이면 굶어 죽는 인민은 없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는 언론도 있었습니다. 위원님께서는 이번 김정일의 발언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고영환

: 북한이 4차 당 대회를 할 때, 그러니까 1960년대지요. 그때 김일성 주석이 전체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고 비단옷을 입게 하고 기와집에서 살게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1960년대 이야기입니다. 이후로 50년이 지났습니다. ‘강냉이밥을 먹이는 게 가슴 아프다’고 이야기했고, 또 최근에는 노동신문에 ‘인민들이 밀가루로 만든 빵과 칼국수를 배불리 먹도록 하는 것’이 자기 소원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50년 전의 ‘이밥에 고깃국’이 이제는 칼국수로 그 수준이 낮아진 겁니다.

사실 북한 주민들이 강냉이밥을 먹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1970년대부터 강냉이밥을 먹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빵은, 아프리카 나라들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에서도 빵은 배불리 먹고 있거든요. 이걸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한마디로 뭐라고 말씀드릴 수 있느냐면, 지난 50-60년 동안 북한의 경제 정책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표치도 낮아지고 있고, 주민들은 그 딱딱한 강냉이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굶고 있는 거지요. 최근에 단천이나 해산 같은 곳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왔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고, 탈북자들을 통해서도 그런 말이 나오고 있거든요. 정말 강냉이밥이라도 제대로 먹였으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박성우

: 위원님께서도 북에 계실 때 강냉이밥을 드셨는지요?

고영환

: 제가 평양에서 대학에 다닐 땐 흰 쌀이 7, 강냉이가 3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7대3의 비율로 섞어서 밥을 먹었는데요. 그만하면 먹을 만 합니다. 그런데 제가 1974년에 ‘사회주의 대건설’ 차원에서 대학 2학년 때 남포에 나갔는데요. 노동자들이 강냉이 8, 흰 쌀 2로 섞어서 강냉이밥을 먹더라고요. 노동자 식당에서 대학생들이 같이 밥을 먹었는데, 솔직히 한 사흘 동안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너무 딱딱하고, 맛이 없고, 소화가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한 3일은 거의 다 버렸는데요. 마지막엔 할 수 없이 먹게 되더라고요. 좀 더 가공을 잘해서 국수로 만들거나 기름에 튀겨서 다른 걸로 만들어 먹이면 좋겠는데, 그걸 그냥 부숴서 쌀과 조금 섞어서 먹으니까 정말 딱딱해서 목으로 넘어가질 않지요.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박성우

: 한국 사람들은 ‘옥수수’라고 부르죠. 그리고 이걸 자주 먹는 편입니다. 이런 모습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고영환

: 제가 어딘가에 가서 대학생들과 이야기하다가 ‘옥수수밥을 먹기가 참 힘들었다’고 말하니까, ‘옥수수가 얼마나 맛있는데’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먹는 옥수수는 간식이잖아요. 찰옥수수를 쪄서 먹던가, 아니면 옥수수에 버터, 북한말로 빠다를 발라서 구워먹는 건데, 이건 별식이지요. 그렇게 먹으면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런데 북한에서 주민들이 먹는 옥수수밥을 먹어보면, 정말 얼마나 먹기가 힘든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걸 한 번 느껴봤으면 해요. 그래서 북한 동포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우리 대학생들도 좀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박성우

: 분단 이후로 남북한의 생활상이 달라진 모습은 강냉이 하나로도 설명할 수 있는 듯합니다. 오늘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과 함께 했습니다. 위원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영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