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진단 한반도] "북한도 쿠바처럼 개혁•개방을"

14년 만에 열린 쿠바 공산당 제6차 당 대회에서 당 제1서기로 선출된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오른쪽)이 자신의 친형이자 전임 국가평의회 의장인 피델 카스트로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공산당은 지난 18일 주택 매매 허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고강도 경제개혁안을 승인했다.
14년 만에 열린 쿠바 공산당 제6차 당 대회에서 당 제1서기로 선출된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오른쪽)이 자신의 친형이자 전임 국가평의회 의장인 피델 카스트로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공산당은 지난 18일 주택 매매 허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고강도 경제개혁안을 승인했다. (AFP PHOTO/Adalberto RO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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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사진단 한반도’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박성우입니다. 무려 52년 동안 집권한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가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오늘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전략정보실장과 함께합니다.

박성우: 실장님, 지난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고영환: 네, 감사합니다.

박성우: 한국 언론들도 이 소식을 많이 다뤘습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역사의 뒷길로 공식 퇴장했다”는 내용인데요. 북한의 우리 청취자들도 관심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카스트로가 지난 19일 공식 석상에 나타났는데, 이게 사실상 은퇴식이었지요?

고영환: 지난 4월19일 쿠바 공산당의 6차 당대회가 폐막했습니다. 여기서 피델 카스트로가 공식적으로 공산당 제1비서 직위와 국가평의회 의장 자리를 혁명 동지인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겨주고 정계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카스트로는 1959년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들어가서 투쟁을 벌이다가 정권을 쥐었고, 이후 무려 52년간 쿠바를 통치했는데요. 비록 독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가 미국의 코앞에서도 정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도력이 있기도 했지만, 워낙 소박한 생활을 했고, 인민들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외교관으로 일할 때 쿠바에 가서 카스트로를 직접 본 적이 있는데요.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카키색 군복의 손목 부분이 닳았더라고요. 북한 대표단을 위해서 자기가 직접 요리를 만들기도 했어요. 김정일 위원장과 사는 모습이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어요. ‘사회주의를 하려면 저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했습니다.

박성우: 카스트로의 검소한 생활이 인민의 지지를 받는 데 한몫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카스트로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에게 권력을 이양했지요?

고영환: 그렇습니다. 카스트로가 두 번 결혼했고, 아들 여섯 명과 딸 두 명을 뒀거든요. 카스트로는 평소에 항상 말한 게 있습니다. 자기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권력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의 자식들은 과학자, 의사, 교원 같은 평범한 일을 하고 있고, 당 직위를 갖지 않았습니다. 세습을 하는 독재자들은 흔히 아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지만, 카스트로는 자신과 오랫동안 같이 혁명을 한 동생 라올에게 권력을 넘겨줬습니다. 그래서 카스트로가 다른 사람들과는 좀 많이 다른 겁니다.

박성우: 다른 독재자들과는 좀 비교가 된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라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는 어떤 모습을 보일 것 같습니까?

고영환: 라올 카스트로가 6차 당대회를 전후로 무려 3백여 개의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정책들을 내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당과 정부, 군대의 고위 간부들이 10년 이상 고위직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고요. 52년간 금지했던 사유 재산을 허용했어요. 쿠바 사람들이 이제 마음 놓고 집과 승용차 같은 재산을 팔고 살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심지어 은행에서 돈도 빌릴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어요. 이건 중국식 개혁 개방보다 더 파격적인 개혁 개방일 수 있다고 보는데요. 아무래도 중국식 개혁 개방으로 쿠바가 변모할 것 같고요. 저는 이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북한도 저렇게 쿠바식으로, 아니면 중국식으로 개혁 개방을 해서 사람들이 제대로 먹고살 수 있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나 생각했습니다.

박성우: 지난주에 이어서 이집트 소식도 다시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두 아들이 현재 교도소에서 생활하고 있다면서요?

고영환: 그렇습니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장남과 차남이 카이로의 토라 지역에 있는 ‘토라 팜’ 교화소에 구금돼 있는데요. 이 교화소에 있는 사람들은 두 아들 외에도 무바라크 시절에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던 사람, 총리, 국회의장 같은 고위 측근들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잡혀 있는 이유는 부정축재를 한 죄,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죄 등입니다. 대통령의 둘째 아들이고 공식 후계자로 선포됐던 가말의 죄수번호가 23호이고, 맏아들 알라가 받은 죄수번호는 24호라고 합니다. 아마 중요도 순서대로 죄수번호를 받은 것 같고요. 특히 주목되는 건 당 정책위 의장, 그러니까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장 같은 직위를 지냈고 공식 지도자로 내정됐던 후계자 가말이 교화소에서 너무 충격을 받아서 밥을 못 먹는다고 해요. 일종의 단식 투쟁을 하고 있는 셈인데요. 좀 더 흥미로운 게 있어요. 무바라크는 조사를 받다가 심장병이 도지면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런데 병이 좀 나으니까 검찰이 교화소로 옮기라고 지시했는데요.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무바라크는 병이 다 안 나았다면서 병원에 그냥 남아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답니다. 이 말을 안 들으면 밥을 안 먹겠다면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다는데요. 그러니까 아들과 아버지가 같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걸 보면 정말 독재자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명백히 드러난다고 봅니다.

박성우: 황태자처럼 생활하던 무바라크의 두 아들이 이제는 수감번호 23번과 24번이 돼 버렸군요.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건데요. 그런데 북한에도 지금 황태자처럼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봉화조’라는 게 있다면서요?

고영환: 네. 한국의 동아일보가 최근에 밝힌 내용인데요. 2000년대 초반 평양에 봉화조라는 게 결성됐는데, 왜 봉화조냐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태어난 곳이 강동군 봉화리거든요. 대를 이어 뭘 하겠다면서 봉화조를 만든 건데요. 여기 들어가 있는 사람은 김정철, 후계자인 김정은, 그 이외에 당과 군대, 보위부, 서기실 등에서 일하는 핵심 간부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은 김정일의 아들들이고요. 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아들인 오세현, 총정치국 조직담당 부국장인 김원홍의 아들인 김철 등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이 여기 들어가서 하는 일은 주로 북한의 외화벌이를 담당하면서 마약을 밀매하고, 가짜 담배를 수출하고,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유통해서 김정일과 김정은에게 고이고(뇌물로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네가 쓰는 건데요.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기도 하고, 외국의 최고급 식료품을 외화로 구입해서 먹고 산다고 합니다. 앞으로 김정은 시대에 이 봉화조가 아무래도 후계 구축에 앞장설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북한 권력이 김 부자 뿐아니라 그 측근 간부들 속에서도 대를 이어 권력이 이어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박성우: 마지막 질문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 곳곳을 이른바 ‘현지 지도’ 형식으로 다니는데, 지난 11년간 한 번도 안 간 곳이 있다면서요?

고영환: 김정일이 아버지가 죽은 다음 가장 힘써서 했던 일이 사상적으로는 선군 사상을 만드는 것이고요.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면에서는 핵 개발이 최대 목표였어요. 북한의 모든 에너지가 다 핵 개발에 들어갔고, 그래서 북한이 지금 핵을 개발했다고 그러는데요. 그렇지만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영변 핵 시설을 김 위원장은 지난 11년 동안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요. 북한의 핵 시설이 워낙 질이 낮고, 그래서 방사능 유출이 심하니까, 지도자가 그런 곳에 가지 않은 거지요. 북한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게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고, 이게 최고의 가치입니다. 불쌍한 노동자와 기술자들만 방사능이 심한 그런 곳에서 일하다가 죽는 거지요. 이건 북한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의 실제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박성우: 북한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핵을 개발하고 있는데, 김 위원장은 이렇게 현장에 가 본 적이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전략정보실장과 함께했습니다. 실장님, 오늘도 감사드리고요.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영환: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