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일, 왜 ‘전승절’이라 부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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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사진단 한반도'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박성우입니다. 정전 60주년이 다가왔습니다. 오늘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과 함께합니다.

박성우: 위원님, 지난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고영환: 잘 보냈습니다.

박성우: 7월 27일은 정전협정을 맺은 날이지요. 올해가 60주년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이날을 ‘전승절’이라고 부르지요. 용어도 다르고, 기념하는 내용도 다른데요. 위원님, 왜 이런 차이가 생겼다고 보면 되나요?

고영환: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허가, 그리고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소련과 중국의 비밀문서들이 세계에 낱낱이 공개되면서 확실한 사실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스탈린은 신형 탱크와 미그 전투기, 자행포를 지원하고, 모택동은 동북에서 싸운 노련한 조선인 부대를 북한에 보내 주었고, 북한은 새벽에 기습공격을 하여 탱크 같은 것은 한 대도 없던 한국군을 몰아붙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이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한국전에 참가하여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몰아냈는데, 이 때 중국이 이른바 ‘지원군’ 수십만명을 보내 결국 3년동안 치열한 전투를 한 거죠.

이 전쟁은 7.27 휴전협정 체결로 멈췄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으로서는 영토가 황폐화되고, 수백만명의 희생자와 고아가 생겼습니다. 진 전쟁이었죠. 그러나 북한은 이상하게도 이날을 전승절로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북한의 논리는 세계 최강 미국을 반대하여 싸운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 전쟁을 김일성이 주도하였다는 것인데, 북한이 전쟁을 시작한 후 지속한 것은 불과 3개월에 불과하였습니다. 1950년 10월부터 1953년까지 북한에서 전쟁을 주도한 것은 중국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한 북한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군중동원과 정신동원 운동이 필요하였고, 그래서 김일성은 이 전쟁을 이긴 전쟁이라고 우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로 말해 이 전쟁은 북한이 이긴 전쟁이 아니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입니다. 다시 말하여, 7.27은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침공을 막은 한국과 유엔군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7월 27일을 휴전일, 정전협정 체결일로 부르는 것이고, 이 표현이 맞는 것이죠.

박성우: 중국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지요. 리위안차오 국가 부주석이 단장입니다. 중국이 누구를 대표단장으로 보낼 것인지가 관심사였는데요. 한국 언론은 중국이 ‘절충안’을 찾은 것 같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위원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고영환: 리위안차오 중국 부주석이 이끄는 중국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리 부주석은 중국의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7인에 속해 있지 않고, 20여명이 되는 정치국 위원 중 한명입니다. 중국은 부주석의 급수가 부총리급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대표단을 보낸 직전 행사인 7.27 40주년 때는 당시 후진타오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대표단을 이끌고 갔었죠. 그러니까 이번엔 명절 규모는 더 커졌는데, 급수는 한 급 내려간 것입니다.

초청 당사자의 명의도 이채롭습니다. 중국은 7.27 행사에 북한 최고상임위원회와 내각의 초청에 의하여 리위안차오를 대표단장으로 보낸다고 발표했습니다. 사실 북한 사람들은 김정은이 제1비서로 있는 노동당과 제1위원장으로 있는 국방위원회가 권력이 있고 힘이 센 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최고상임위원회와 내각은 허수아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국이 국방위원회와 노동당의 초청이라고 밝히지 않고 상임위원회와 내각의 초청이라고 한 것은 북한이 더는 중국의 형제 국가가 아니고, 북중 양국은 그저 일반적인 국가 대 국가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북한이 명절로 경축하는 기념일을 이전의 “피로써 맺은 관계”에서 벗어난 일반국가 관계의 기념일처럼 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성우: 한국과 미국도 7.27 정전 기념행사를 갖는데요. 특히 워싱턴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기념 행사에 직접 참석하기로 했지요?

고영환: 미국에서는 7.27을 맞으면서 정전 60주년 기념 위원회를 만들었고, 이 위원회가 워싱턴에 있는 6.25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에서 개최하는 정전 60주년 기념행사에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여 기념 연설을 한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미국에서 6.25전쟁과 관련한 행사들이 있었지만,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바가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에 미국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참석하고, 여기에 국방장관, 보훈장관 등 주요 장관들과 미 국회 상하원 의원들이 대거 참석한다고 합니다.

사실 그 동안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이 크게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6.25 전쟁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고, 이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미국을 비롯하여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하였던 나라들에서 자국의 한국전쟁 참전 소식을 크게 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워싱턴 행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특사 대표단이 참가하는 등 최대 규모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한국에서도 7.27과 관련하여 27일 당일 한국전쟁에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하였던 나라들의 총리와 국회의원 등이 대규모로 참석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유엔과 자유세계 그리고 한국에서는 7.27을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박성우: 60여년 전 한국을 위해 싸웠던 참전용사들이 요즘 한국을 다시 찾고 있는데요. 이분들 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참 감회가 새롭습니다. 위원님도 관심을 갖고 보셨을 텐데요.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요?

고영환: 먼저 한국의 지식경제부가 2011년에 발표한 통계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국이 정부를 수립한 1948년에 한국의 총 외화 수출액은 1,900만 달러였습니다. 당시 아프리카 카메룬의 수출액이 4,000만 달러였으니, 한국의 수출액은 카메룬의 절반도 안 되었던 것이죠. 한국은 아프리카의 절반만큼 밖에 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미국의 수출액이 126억 달러, 프랑스가 20억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2011년에 한국은 5,087억 달러를 수출하는 국가로 도약했습니다. 연간 수출액 5,000억 달러를 돌파한 것은 세계에서 여덟번째이며, 이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수출액을 능가하는 수치입니다. 한국보다 먼저 수출액 5,000억 달러를 돌파한 나라는 미국, 독일, 중국,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7개 나라뿐입니다. 북한의 2012년 수출액이 28억 달러이니, 남북경제 규모의 차이는 거의 180배 나는 것입니다.

지금 서울 광화문에서는 6.25 전쟁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가보았는데, 사진들을 보면 60년전 한국과 북한은 참으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애들이 콧물을 줄줄 흘리고, 애들 머리엔 잘 먹질 못해서 비듬이 번지고, 어른들은 지게를 메고 다니고, 참으로 60여년전 우리는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부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최근 몇년간 한국을 찾아오는 6.25 참전 국가의 노병들이 많습니다. 미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등 발전된 나라의 노병들은 한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데 대해 놀라움을 표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피흘려 지킨 나라가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한데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폐허가 되었던 나라, 찢어지게 가난하였던 나라, 폐허였던 서울이 이처럼 발전한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노병들의 장면이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데요. 저도 그런 모습을 보며 울었어요.

최근에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중국군 묘지를 찾아오는 중국 사람들과 중국 참전 노병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적국이었던 한국이 중국군의 묘지를 만들어 잘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특히 참전 노병들은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떻게 적군이었던 사람들의 묘지를 이렇게 잘 만들어 놓았는가. 이젠 한국과 중국은 친구나라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박성우: 남북 모두 전쟁의 잿더미에서 같이 출발했는데, 60년이 흐른 지금은 왜 180배의 경제력 격차가 생겼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과 함께했습니다. 위원님, 오늘도 감사드리고요.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영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