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사진단 한반도’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박성우입니다. 지난 10월10일은 노동당 창당 66주년이었습니다. 또한 최고위급 탈북자 황장엽 선생의 1주기였습니다. 오늘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전략정보실장과 함께합니다.
박성우: 실장님, 지난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고영환: 네, 잘 보냈습니다.
박성우: 10월10일은 노동당 창당일입니다. 올해로 66주년이었는데요. 상대적으로 조용히 지나갔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왜 그랬다고 보십니까?
고영환: 지난 10일은 다 아시다시피 노동당 창건 66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요. 금수산 기념궁전 참배나 만수대 김일성 동상 참배 같은 일부 정치 행사는 있었지만, 당 대표자회나 당 전원회의, 그리고 열병식 같은 큰 정치 행사가 열리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한 달 전인 9월9일 공화국 창건 63주년 때에는 정주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열병식까지 했었거든요. 이런 점에서 볼 때, 당 창건 기념일에 아무런 회의나 행사를 하지 않은 건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제가 북한에서 외교관 생활을 할 때도 항상 정권 창건일 보다는 당 창건 기념일을 더 크게 쇘고, 6차 당 대회나 5차 당 대회에서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린 큰 대회들이 모두 당 창건 기념일에 맞춰서 진행됐거든요.
지난 7일 미 백악관 안전보장회의 베이더 전 선임보좌관이 한국의 조선일보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이 중요 결정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충분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어요. 아주 의미 있는 발언으로 보이고요. 김정은은 지난해 9월에 공식 후계자가 됐고, 10월에 자신이 후계자라는 것을 만방에 선포했습니다. 저도 김정은이 올해 당 창건 기념일에 맞춰서 당 정치국 위원이나 정치국 상무위원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런 일이 안 벌어졌지요. 전원회의도 없었고, 대표자회도 없었어요. 이런 걸 보면 김정은이 현재까지는 김정일을 보조하는 데 주력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김정은이 아직도 당 중앙위원회나 국방위원회 등 주요 권력기구에서 완전하게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 있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성우: 10월10일은 노동당 비서였던 황장엽 선생의 1주기이기도 했지요?
고영환: 그렇습니다. 황 선생님이 지난해 10월10일에 돌아가셨는데요. 당 창건 기념일에 돌아가신 거지요.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는 북한이 중국이나 그 어떤 사회주의 나라도 하지 않았던 3대 세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황 선생님은) 정말 많이 분노하고 기가 막히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날 돌아가시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고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요. 지난 10일 서울의 중심 빌딩이라고 할 수 있는 63빌딩에서 추모식이 장엄하게 거행됐어요. 김영삼 전 대통령, 이회창 자유선진당 전 대표, 전 국회의장들, 전 총리들, 한나라당 현역 국회의원들, 탈북자 단체장들, 탈북자들 포함해서 300명 이상이 참가했습니다. 저도 거기 앉아서 생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지나서 11일에는 국립 현충원, 그러니까 북한으로 말하면 ‘대성산 혁명열사릉’과 비슷한 곳인데, 이곳에 있는 황 선생님 묘역에서도 참배식이 거행됐어요. 이 자리에도 한나라당, 정부, 탈북자 대표들이 많이 참가했습니다. 모든 참가자들은 황 선생님 생전의 뜻을 기리자고 맹세를 다졌습니다. 황 선생이 (한국에) 오실 땐 혼자 오셨는데, 지금 다른 탈북자들 말을 들어보면 ‘2만 3천 명 탈북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박성우: 황장엽 선생이 한국에 오셔서 이룬 업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미완의 과제는 뭐라고 보면 되나요?
고영환: 황 선생님은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의 이론 서기,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 당 과학교육 담당 비서, 주체사상 담당 비서, 국제사업 담당 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 고위직을 다 지낸 최고급 간부인데요. 북한이 그렇게 세계에 자랑하는 주체사상도 황 선생님이 이론적 기초와 논리를 만들었고, 김일성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북한을 떠나 한국에 온 것은 아마 북한 지도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생각합니다. 황 선생님의 탈북에 온 북한이 다 술렁거렸고요. 김정일은 굉장히 진노했다고 해요. 그 진노 때문에 2천 명 이상의 황 선생님 가족, 친척, 선후배, 친구들이 생명을 잃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황 선생이 와서 이룬 업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자유민주주의를 실시하고 있는 남한이 독재를 실시하고 있는 북한보다 훨씬 더 우월한 정치 경제적 체제를 갖춘 나라라는 걸 남북한 전체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이라고 보고요. 두 번째로 북한의 1인 지배체제가 얼마나 가혹하고 반 인민적인가 하는 것을 한국 인민들에게 알려주고, 그리고 한국과 전 세계 사람들을 각성시킨 것이라고 보고요. 세 번째는 북한 사람들이 자유와 사람다운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황 선생님께서 싸웠는데, 이게 북한 민주화 운동과 북한 인권 향상 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황 선생님은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황 선생께서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북한 인민이 완전하게 독재에서 해방돼서 남한 인민들처럼 자유롭게 사는 모습, 이걸 못 보고 돌아가신 게 미완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성우: 황장엽 선생이 탈북한 다음 북한 당국의 황 선생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변화했습니까?
고영환: 황 선생님이 탈북한 후 북한 당국은 그를 ‘변절자’, ‘지주의 아들’, ‘신임을 저버린 사람’ 등으로 부르고 평가절하하면서 비판을 많이 했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황 선생님은 김일성과 가장 가까이 있었고, 김정일과 가까이 있었고, 주체사상의 창시자이고, 노예 상태에서 살고 있는 북한 인민들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온 생을 바친 애국자이고 굉장한 인물이라는 사람들의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박성우: 실장님은 서울에서 황 선생을 오랫동안 지켜보셨는데요. 황 선생을 개인적으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고영환: 북한에서 외교관으로 있을 때부터 황 선생님을 알았어요. 그분이 국제담당 비서를 할 때 인민문화궁전에서 그분의 통역을 한 적도 있고, 국제부 청사에 들어가서 통역을 한 적도 있거든요. 언제나 맑고 선비 같은 분이었고요. 한국에 오신 다음에는 한 달에 두 세번 씩 계속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저한테는 스승과 같은 분입니다. 북한은 황 선생님이 한국에 와서 차별만 받다가 사망했다고 선전했는데요. 명백한 건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부총리급의 대우를 받으셨고, 돌아가신 후에 정부는 국가원수들이 타는 훈장인 무궁화 1급 훈장을 수여했고, 그분을 국립 현충원에 모셨다는 점입니다. 현충원은 ‘대성산 혁명 열사릉’보다 사실 더 잘 꾸려진 곳이고, 급이 높은 분들이 가는 곳입니다. 황 선생님이 서울에 오지 않고 평양에서 돌아가셨으면 아마 ‘신미리 열사릉’ 같은 곳에 묻혔을 겁니다. 이곳은 2급 열사릉이지요. 저는 황 선생님이 정말 일생을 조국과 민족, 북한 인민의 해방과 자유, 통일을 위해서 애쓰신 소중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성우: 황장엽 선생은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를 상징하는 분이었지요. 앞으로도 10월10일은 노동당이 생긴 날이라는 의미 말고도, 황 선생의 행적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전략정보실장과 함께했습니다. 실장님, 오늘도 감사드리고요.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영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