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사진단 한반도’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박성우입니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의 최후가 구체적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전략정보실장과 함께합니다.
박성우: 실장님, 지난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고영환: 네, 잘 보냈습니다.
박성우: 카다피가 고향에 숨어 있다가 시민군에 붙잡혀서 사망하기 전까지의 마지막 모습이 언론에 구체적으로 보도되고 있는데요. 실장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고영환: 리비아의 카다피 국가원수가 지난 20일 사망했고요. 그 동안 많은 외신 보도가 있었는데, 이걸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수도 트리폴리가 시민들의 손에 의해 해방된 게 지난 8월21일입니다. 그 직전에 카다피는 수십 명의 친위대원과 함께 수도를 몰래 빠져나와서 고향인 시르테로 갔고요. 그곳에서 카다피는 낡은 집, 버려진 집에서 부하들이 구해온 쌀과 밀가루 같은 걸로 간신히 연명했다고 해요. 나토군의 공습이 무서우니까 2-3일에 한 번씩 거처를 옮기면서 숨어 살았다고 하고요. 도피 생활이 좀 길어지면서 카다피는 “왜 여기는 물도 나오지 않는가”, “왜 전기가 자꾸 끊어지나”라며 짜증을 냈다고 해요. 일반 대중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지 카다피는 몰랐다는 거지요.
지난 20일, 시민군의 총공격이 시르테에 가해졌는데요. 카다피는 수십 대의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호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시르테를 빠져나가려다 나토군의 전투기에 발각됐고요. 나토군 전투기가 폭격을 하니까, 카다피는 차를 버리고 하수도 구멍으로 숨어들었어요. 이를 시민군이 발견했는데, 카다피가 황금 권총을 내려놓으면서 “내가 카다피다, 제발 쏘지 말라”면서 하수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는 동영상이 많이 나왔는데요. 카다피가 시민군에게 매를 많이 맞았어요. 이리저리 개처럼 끌려 다녔는데요. 카다피는 자기를 잡은 시민군에게 “제발 죽이지만 말라, 뭐든지 다 주겠다, 원하는 건 다 주겠다”고 했는데요. 시민들이 워낙 분노를 많이 했으니까, 한 시민군이 카다피에게서 빼앗은 황금권총으로 그를 사살한 걸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의 시신은 시내의 한 정육점에 전시됐어요. 독재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겠다고 수많은 리비아 시민들이 줄을 섰고, 승리의 브이(V)를 손으로 그리며 사진도 찍었는데요. 시신을 보려 몰려든 사람들의 줄이 굉장히 길었어요. 거기엔 카다피의 시신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넷째 아들 무타심도 같이 죽었거든요. 카다피와 최후를 같이 한 국방장관의 시신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 명의 시신이 정육점에 같이 안치된 거죠. 왜 정육점이냐면, 거긴 냉장시설이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신들은 ‘리비아 과도 위원회’가 사막의 어느 곳에 몰래 매장했다고 합니다. 리비아 과도 위원회는 24일을 공식 해방일로 선포했고요. 트리폴리와 리비아 전국은 ‘자유 리비아’를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독재자는 언제나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점, 그리고 독재자의 말로는 항상 비참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성우: 김정일을 포함해서 북한의 고위급 당 간부와 군 간부들도 카다피의 마지막 모습을 봤을 텐데요. 뭘 느꼈을까요?
고영환: 리비아의 해방과 카다피의 사망에 대해서 북한이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고 있는데요. 제가 북한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외국에 있던 시절, 저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처형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봤거든요. 그리고 선전선동부가 보내라고 해서 차우셰스쿠의 처형 모습이 담긴 방송용 테이프를 북한으로 보내기도 했어요. 그 후 최고위급 외교 간부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그 처형 모습을 봤다고 합니다. 당시 외무성과 국제부의 대남부서, 그리고 군 간부들도 그 처형 모습을 봤다고 하는데요. 이번에도 아마 카다피의 마지막 모습을 고위 간부들은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굉장히 놀랐겠지요. 충격 자체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왜냐면 카다피와 김정일 위원장은 비슷한 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아마 미래를 걱정하고, 이젠 인민을 좀 더 두려워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성우: 독재자의 최후는 엇비슷한 것 같습니다. 김정일과 카다피도 공통점이 많다면서요?
고영환: 히틀러, 사담 후세인, 차우셰스쿠, 카다피, 김정일 등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첫째, 자신을 신격화한다는 거지요. ‘위대한 영도자’, ‘탁월한 수령’, ‘혁명의 지도자’라고 부르게 하고, 자신을 우상화했다는 거지요.
두 번째로, 황금과 외화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히틀러와 카다피는 황금 권총을 가지고 있었어요. 김정일은 자신의 쌍안경도 황금으로 된 걸 가지고 다녔어요. 지난해 4월 김정일이 ‘567 군부대’를 현지 지도할 때, 책상에 황금으로 된 쌍안경이 놓여있었습니다. 카다피의 경우, 초기엔 그의 외화 재산이 6백억 달러로 알려졌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건 무려 2천억 달러라고 합니다. 자신은 항상 ‘나는 소박해서 천막에서 산다’고 리비아 인민에게 선전했는데, 실제로는 황금으로 된 요새에서 황금으로 도금한 소파를 사용하며 살았던 거지요. 이런 기억도 나네요. 1990년대 초반, 북한의 대성은행과 금별은행에서 일하다가 한국으로 온 최세웅 씨는 김정일 위원장이 1990년 초에 스위스 등 구라파 나라에 쌓아둔 외화가 이미 40억 달러에 달한다고 폭로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공통점은, 히틀러와 카다피, 그리고 북한 등이 최신식 땅굴을 파뒀다는 겁니다. 유사시에 대비한 거지요. 그런데 카다피는 지하 땅굴을 써보지도 못했어요. 핵 공격에도 견딘다는 지하 시설을 멋지게 만들어 뒀는데, 카다피는 리비아 인민에 의해서 처단됐기 때문에, 이걸 써보지도 못했던 거지요. 그리고 제가 평양에 있을 때 외교부의 고위 간부로부터 들은 말인데요. 북한은 1980년대에 이미 김정일 위원장의 집무실에서부터 평성의 자모산까지 땅굴로 연결했다고 그러거든요. 그리고 요즘 나오는 증언을 보면, 지금은 향산까지 연결했다고 합니다. 이런 땅굴을 만드는 데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데요. 그 돈을 인민을 위해 썼으면 얼마나 좋겠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박성우: 북한과 리비아의 관계, 과거에는 어떠했습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어찌 될 걸로 전망하십니까?
고영환: 북한과 리비아는 굉장히 각별한 우호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982년 카다피 원수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도 만났고요. ‘조선-리비아 우호 협력동맹 조약’도 맺어서 군사동맹 수준으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1978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수억 달러어치의 북한제 무기가 리비아에 들어갔어요.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이 리비아 조종사들을 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리비아에는 의사, 간호사, 건축기사 등 200여명의 전문가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리비아 사태 발생 이후, 그 소식이 북한에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당국은 이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지요.
많은 국가들이 리비아 과도 위원회를 지지하고 리비아 혁명을 지지했는데, 북한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재자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니까 과도 위원회와 리비아 인민들은 북한에 대해 화가 많이 나 있거든요. 앞으로 북한 대사관이 리비아에서 철수하지 않을까 싶고요. 최악의 경우엔 북한과 리비아의 외교관계까지 단절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성우: 리비아도 재건 과정에서, 혹은 새로운 정부를 출범한 이후에, 북한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고 청산할 것으로 보인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지금까지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전략정보실장과 함께했습니다. 실장님, 오늘도 감사드리고요.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영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