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전망대] 기약 없는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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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기약 없는 상봉’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청취자 여러분, 이번 추석에 가족, 친지들과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잘 지내셨는지요? 북한 정부가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어긋난다며 배격하다 1988년 민족 고유의 명절로 복원시킨 추석은 가족과 친지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조상에 감사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하지만, 흥겨워야 할 추석에 유난히 가족 생각에 비통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북한이 휴전선으로 갈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가족 친지를 떠올리며 분단의 현실에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인 한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통에 부모, 형제들과 헤어진 후 한국과 미국에서 살다가 지난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북한에 두고 온 형제들을 잊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북한에 있는 가족의 안위를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안타깝게도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이산의 한을 가슴에 묻고 말았습니다.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다른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숨을 거두기 수년 전부터 늘 태평양 건너 한반도 쪽을 향한 창문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셨다고 합니다. 마지막 몇 년 동안 담배를 더 자주 피우셨다는 가족의 말을 고려하면, 아마 몸은 쇠약해지는데 북한에 있는 아들을 만날 길이 없으니 타는 속을 그렇게 담배로 달래셨나 봅니다.

이산가족들은 여든 살이 넘으신 분이 수두룩합니다. 지난 7월 현재 남한의 이산가족 상봉신청인 8만8천여 명 가운데 여든 살 이상 노인이 약 40%나 됩니다. 아흔 살이 넘은 신청인도 5천 명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이들 고령자는 하루하루 건강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이들에겐 그토록 그리던 북한 가족과의 상봉이 멀어져만 갑니다.

그나마 가물에 콩 나듯 추석을 전후해 이어져 온 남북 이산가족 상봉도 올해엔 ‘그림의 떡’이 되었습니다. 상봉은 양측이 손바닥을 마주쳐야 하는데, 남한 측이 아무리 애를 써도 북한 측이 무력도발을 하고 나오니 어찌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남한 정부 자료를 보면 매년 약 4천 명의 이산가족상봉 신청인이 노환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북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런데도 북한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상봉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한의 이산가족에겐 북한 가족을 만날 기회가 조금이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이산가족에겐 이마저도 없습니다. 미국적십자사가 미국에 사는 한인 이산가족의 상봉을 위해 지난해 10월 북한적십자사에 서한을 보내 대화를 촉구했으나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인권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온 유엔도 이산상봉 노력을 거들고 있습니다. 유엔의 마르주키 다루스만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북한인권보고서에 이산가족 상봉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정례화하자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미국 국무부의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가 지난 5월 말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제 1부상 등 고위관리들과 미국에 사는 한인이산가족의 상봉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시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한인 이산가족과 북한의 가족이 시범적으로 서신을 교환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나 결과가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 지역에 사는 5천여 실향민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9월 10일 미국의 동부 메릴랜드 주의 한 공원에서 망향의 아픔을 달래고 북한의 가족을 상봉할 날을 기원하면서 이북도민의 날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한 낭보가 날아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실향민들은 날로 건강이 악화해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한 예술가가 영상편지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실향민들이 미리 영상편지를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라도 북한의 가족들에게 이 편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영상편지는 한국의 실향민을 비롯해 미국의 실향민까지 포함해 하나 둘 기록을 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영상편지가 완성되더라도 북한 측이 이를 받아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북한은 외부세계와의 인적 교류가 체제안정을 저해한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문제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그리고 민간차원의 노력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지만, 성과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백 번을 양보해 북한정부가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국 내 이산가족들의 애절한 한을 조금이라도 들었으면 합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