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 밖에서 일어나지만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박봉현의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구제역과 개방’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지난달 말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의 수남장마당에서 돼지고기가 kg당 3천700원에 팔렸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보다 1주일 전 kg당 5천 원씩 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싸진 겁니다. 당시 한국에선 구제역 확산으로 감염된 돼지를 살처분하느라 돼지고기가 귀해져 값이 많이 오른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라 관심을 끌었습니다.
북한에서도 구제역이 퍼지고 있다면 돼지고기 값이 한국에서처럼 올라야 하는데 되레 내렸다고 하니 아마 구제역이 북한을 비켜간 게 아니냐 하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설령 돼지가 구제역에 걸려도 쉽게 매몰하지 않을 것이란 견해가 나오면서, 돼지고기 값 인하와 구제역 사이에 뭔가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북한의 목장들이 구제역에 걸려 비실비실하는 돼지를 매몰하지 않고 싼값에 내다 팔아 장마당 돼지고기 가격이 내려갔다는 해석이지요.
당시엔 북한이 구제역과 관련한 사정을 속속들이 밝히지 않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당국은 고사하고 수의사들마저도 이를 쉬쉬했으니 일반 주민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북한당국은 주민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전염병 발병 사실도 ‘모르는 게 약’이라는 식으로 덮으려 했습니다. 주민의 동요와 체제불안 요소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온 북한이 오랜 세월 관행처럼 해 온 행동이라 하등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당국이 지난 9일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에 서한을 보내 구제역 발생을 확인하고 지원을 요청한 사실이 자유아시아방송의 보도로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입단속을 하던 북한은 급기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구제역 발생으로 소와 돼지 1만여 마리가 감염됐다고 뒤늦게 시인했습니다.
구제역은 북한 농가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구제역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린 행동은 반길 만합니다. 오죽 상황이 심각했으면 북한당국이 그랬겠나 싶지만, 많은 주민을 더 큰 곤경에 빠뜨리는 대신 늦게나마 어쭙잖은 자존심 버리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청함으로써 폐쇄적인 북한사회의 틈을 내보였다는 데에 그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북한의 구제역 발병 통보는 상징적인 의미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긴급지원이라는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줍니다. 북한은 2007년과 2008년에도 구제역으로 세계식량기구로부터 미화 43만 달러를 지원받은 적이 있습니다. 북한의 구제역 백신은 잘 듣지도 않고 그 양도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일부 목장에선 살충제를 뿌리거나 횟가루를 물에 타 돼지우리에 바르는 재래식 처방을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국제기구가 전문가들을 파견해 대책을 수립하면 구제역 확산을 억제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북한의 소들은 파종기에 농사일을 돕는 일등공신입니다. 그런데 구제역이 확산해 소들이 서지 못하고 논바닥에 맥없이 퍽퍽 주저앉으면 올해 농사를 망쳐 고질적인 식량난을 더 악화시키게 됩니다. 국제기구의 전문가들이 현장조사를 마치고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구제역은 올해로 종식되는 병이 아닙니다. 내년이든 후년이든 언제든 재발할 수 있습니다. 가축과 농민들을 보호하는 길은 구제역 예방을 철저히 하고 발병 시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입니다. 북한은 이번에 국제사회에 문을 두드려 약효가 제대로 듣는 백신을 지원받아 앞으로 있을지 모를 구제역을 예방할 방도를 찾게 됐습니다.
가랑비에도 옷이 젖습니다. 작아 보이는 일이라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면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개방에 대한 꺼져가는 기대가 다시금 빛을 내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 구제역과 관련한 북한당국의 ‘작은 개방’이 하나둘 쌓이면 점점 ‘큰 개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에서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