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현의 북한 전망대] 그랜드 바긴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 밖에서 일어나지만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박봉현의 북한전망대’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랜드 바긴’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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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2007년 11월 미국 매릴랜드 주 아나폴리스에서 중동평화 협상을 주선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규는 중동지역을 제3차대전의 화약고로 부를 만큼 휘발성이 강했습니다. 수십 년간 지속한 두 민족 간 싸움은 좀체 해결의 접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두 민족을 협상장으로 끌어냈던 것입니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의 골이 깊고 의견이 상충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부분적인 협상으로는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그랜드 바긴' 즉 일괄타결 방식이었습니다.

미국이 제시한 그랜드 바긴(Grand Bargain)은 '두 국가 해법'이었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공존하는 평화협상을 진행하자고 제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약 1년간 협상이 진행됐었습니다.

하지만, 2008년 12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가자지구를 공격하면서 평화협상은 중단됐습니다. 미국이 정성 들여 쌓았던 '평화의 집'은 한순간 밀려온 파도에 '모래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어 지난 3월 새로 집권한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미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가자지구에 유대인 정착촌의 건설을 강행해 평화협상에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듯했습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초부터 공들인 중동 평화협상의 결실을 보려 내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각각 단독 정상회담을 한 뒤, 이어 3자 정상회담을 엽니다. 그랜드 바긴을 소생시키려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푸는 데도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1일 미국 뉴욕에서 연설하면서 '그랜드 바긴'을 제시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랜드 바긴은 하나를 주고 이에 상응하는 하나를 받는 단계별 주고받기 식 해법이 북핵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경험에서 비롯됐습니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는 대신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포괄적인 지원을 한다는 게 그랜드 바긴의 핵심입니다.

그랜드 바긴은 말 그대로 거창하고 멋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름값을 하려면 적지 않은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일괄타결 방식으로 한다는 '두 국가 해법'은 미국이 제시한 것이지만, 북한 핵 문제에 대한 그랜드 바긴은 한국이 꺼냈다는 점이 그 실현가능성을 점치기 어렵게 하는 첫째 요인입니다.

미국의 북핵정책을 입안하는 국무부 관계자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 후 그랜드 바긴에 대해 "솔직히 모르겠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이다" 라며 한 발 빼는 발언을 했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야심작'에 미국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미국과 완벽한 사전조율을 거치지 않은 그랜드 바긴의 태생적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랜드 바긴의 본래 성격이 협상을 힘들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랜드 바긴은 갱 영화에서 가끔 등장하는, 마약과 현금을 교환하는 장면처럼 양측이 단번에 큰 거래를 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거래과정이 간단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방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하므로, 권투에서 작은 주먹을 꾸준히 날려 상대를 때려눕히는 대신 KO 주먹 한 방을 노리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물론 그동안 북한과 했던 협상에서 사용된 단계적 접근법이 효과를 내기는커녕 북한에 핵을 개발할 시간만 주었다는 지적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한 북한과 하는 줄다리기가 백해무익하다는 결론이 그랜드 바긴을 낳은 점도 사실입니다. 그랜드 바긴은 북핵문제가 교착상태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마냥 지켜볼 수 없다는 현실인식에서 나온 배포가 큰, 그러나 절박한 대안입니다.

그랜드 바긴이라고 해도 국가와 국가 간 사안을 풀어가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거치는 동안 종전의 단계적 접근법의 부작용이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줄 것은 주고받을 것은 받고 나서 악수하고 자리를 뜨는 식으론 그랜드 바긴을 집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작업에 돌입하면 예기치 못한 변수가 돌출해 협상의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랜드 바긴의 성패는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6자 회담 관련국들의 대북 선물 보따리의 내용과 핵을 완전무결하게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 장애물에도 적어도 한국 정부는 그랜드 바긴이 열매를 맺길 바라고 있습니다. 북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의 염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