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전망대] 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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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개꿈'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잡니다.

새해 벽두에는 누구나 희망을 꿈꿉니다. 북한의 음악인들도 재능을 세상에 떨치기를 꿈꿀 겁니다.

북한 모란봉악단의 여성 5중창단이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마이크를 손에 쥔 여성들은 각기 다른 색의 원피스 차림이었습니다. 왼쪽부터 빨간색, 흰색, 하늘색, 남색, 자주색 계통의 옷을 입었습니다. 옷은 반짝거리는 장식으로 번쩍거렸습니다. 원피스는 짧았으며 소매는 겨드랑이 가까이 올라갔습니다. 북한에서는 다소 화려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퇴폐적이진 않았습니다.

중창단은 '배우자'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약 3분 15초 동안 시종 율동을 했습니다. 안무를 익히느라 단체 연습을 꽤 했겠지만, 단조로웠습니다. 초보적인 단체 율동 수준이었습니다. 율동이 거의 없는 북한 여성중창단의 공연치고는 상당한 변화였으나,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라고 할 순 없었습니다.

요란한 율동이 북한 사회에서 한계가 있겠지만, 좀 더 활달하게, 좀 더 기발하게 안무를 시도해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어 보였습니다. 단아한 모습에 맞는 안무를 무대에 선보이면 북한 내부는 물론 외국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당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가사나 곡이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중창단 다섯 여성의 가창력은 괜찮았습니다. 한 명씩 부르는 독창 부분에서는 개성 있는 음색으로 매력을 뿜었습니다.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때는 숲 속에서 지저귀는 산새들의 청량한 화음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곡의 가사와 리듬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하면 북한을 대표하는 중창단으로 거듭날 수 있는 솜씨였습니다. 북한의 권력자들을 위무하고 체제를 찬양하는 일에서 벗어나 북한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세상에 알리고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음악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한의 걸그룹이 문화 한류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모란봉악단 여성중창단도 북한의 걸그룹으로 탄생할 수 있어 보였습니다.

남한의 걸그룹은 20여 개나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실력 있는 젊은이들이 뭉쳐 수년간 갈고 닦은 기량을 대중에 선보이고 냉혹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걸그룹이나 신생 걸그룹이나 냉정한 현실에서 인정받기 위해 율동과 노래 연습에 땀 흘리고 있습니다. 유능한 작곡가, 작사가들은 걸그룹에게 좋은 곡을 주려고 밤을 새며 악상을 떠올리고 대중의 가슴을 파고들 가사를 씁니다. 이렇게 참신하고 알찬 콘텐츠를 엮어내려는 노력이 한류 중심에 선 걸그룹을 탄생시킵니다.

남한의 '한류미래전략연구포럼'이 최근 마련한 세미나에서 한류의 경제적 효과가 800억 달러를 웃돌며 향후 수십 년 간 지속할 경우 그 효과가 수천억 달러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습니다. 한류 효과를 수치로 정확히 환산하는 게 어렵지만, 아무튼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겁니다.

모란봉악단 중창단이 북한 걸그룹으로 재탄생 했을 때 그 가치는 경제적 효과에 그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북한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활짝 핀 꽃처럼 멋지게 펼친다는 데 있습니다. 북한에는 모란봉악단의 중창단 외에도 노래실력이 빼어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발굴이 안 되고 계발이 안 돼 그렇지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만 조성되면 숨은 '진주'들이 여기저기서 빛을 발할 겁니다. 또 북한 걸그룹들이 실력을 겨루면서 서로를 부쩍 키울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북한이 점점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 변해갈 겁니다.

모란봉악단은 '북한식 한류'의 선봉에 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2012년 7월 6일 평양에서 선뵌 이 악단의 데뷔무대는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7월 27일 모란봉악단의 두 번 째 공연에 등장한 여성 중창단은 '북한식 한류'의 가능성을 날려버렸습니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중창단은 무대에 올라 '이 땅의 주인들은 말하네'란 3분 40초짜리 곡을 별 율동 없이 불렀습니다. 옷차림도 지난번 공연 때와 달리 여름용 갈색 군복 차림이었습니다.

북한지도부가 모란봉악단의 공연이 남한의 걸그룹을 연상케 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나 봅니다. 자본주의적 풍조가 번질까 조기에 차단하려 했나 봅니다. 일본의 언론은 최근 입수한 '김정은의 내부 발언록'을 인용해 김 노동당 제1비서가 청년들이 공연을 보고 엉덩이를 흔드는 등 자본주의적 풍조가 퍼질 것을 우려했다고 전했습니다. 모란봉악단의 여성중창단이 북한 걸그룹으로서 개방의 선봉에 섰으면 하는 바람에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어리석고 미련한 개꿈"이라며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북한식 한류'가 세상에 퍼져 나갔으면 하는 새해벽두의 바람은 이렇게 한낱 개꿈으로 끝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