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스키시범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백두산지구 체육촌을 비롯해 양강도 삼지연군(郡)의 여러 곳을 돌아보고 있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백두산지구 체육촌을 비롯해 양강도 삼지연군(郡)의 여러 곳을 돌아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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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김정은의 스키시범'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저희 자유아시아방송국이 있는 미국 수도 워싱턴 일원에 최근 큰 눈이 내렸습니다. 직장에 가야 하는 어른들은 조심스레 운전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임시휴교로 집에 있던 어린이들은 땅을 덮은 하얀 눈에 마냥 즐거워했습니다. 털장갑과 털모자로 중무장한 어린이들은 창고에 있던 썰매와 스노보드를 꺼내 동네 비탈에서 옷이 다 젖도록 타고 놀았습니다.

겨울에는 역시 눈과 함께하는 야외활동이 제격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가족, 친구들이 삼삼오오 스키장을 찾습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은 고난도 코스에서 나보란 듯 실력을 뽐내고, 초보자들은 쉬운 코스에서 기술을 연마합니다. 주민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저마다 행복해합니다.

미국에는 북한이 최근 개장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한 마식령 스키장보다 빼어난 스키장이 많습니다.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주의 경계에 자리한 호수 '레익 타호'의 헤븐리 스키장도 그 중 하나입니다. 헤븐리 스키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40도가량 돼 보이는 급경사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네 언덕처럼 완만한 경사에서 스노보드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수도 없이 엉덩방아를 찧어도 만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스키나 스노보드를 타다 출출하면 스키장에 마련된 식당에서 도란도란 식사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밭을 지쳐댔습니다.

미국의 스키장은 외국 관광객은 물론이고 한인을 포함한 현지 주민들로 북적댑니다. 스키장 이용료가 별로 비싸지 않아 주민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스키장은 서민들이 부담 없이 찾는 곳입니다. 스키장은 평범한 주민들의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해줍니다.

북한의 마식령 스키장도 주민들의 체력을 단련하고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 야외활동 마당이 될 수 있습니다. 북한 정부도 마식령 스키장 건설 계획을 발표할 때 그렇게 자랑하곤 했습니다. 스위스에서 생활했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최근 개장한 마식령 스키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외투에 손 넣고 그저 구경만 한 게 아니라 직접 스키를 탔습니다. 고난도 코스에서 스키 시범을 보였습니다. 이를 지켜본 스키장 직원이 "정말 멋졌다"라고 말했다고 하니, 김정은의 실력이 보통은 넘었나 봅니다. 진짜 스키를 타고 싶어 하는 주민들은 제쳐놓고 김정은은 그 넓은 스키장에서 홀로 스키를 즐겼습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종종 서민들이 애용하는 백악관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 들릅니다. 다른 손님들을 모두 내쫓거나 식당을 독점하지 않고 남들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다 차례가 되면 햄버거를 사 먹습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과 격의 없이 담소를 나눕니다. 김정은도 동원되지 않은 평범한 주민들과 함께 스키를 즐겼다면 오바마 대통령처럼 특권의식을 내려놓은 지도자로 비쳤을 겁니다. 물론 이런 기대 자체가 비현실적이란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북한 매체는 마식령 스키장 개장 후 북한주민 약 2천 명이 다녀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온 우수한 대학생 대표와 분야별 선진 노동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라, 늘 그렇듯 선전을 위해 동원된 것입니다.

마식령 스키장 하루 이용료는 미화 35달러 정도입니다. 보통 북한 노동자 월급을 6년간 꼬박꼬박 모으면 하루를 즐길 수 있습니다. 장마당에서 부수입을 올리는 사람이라도 이만한 돈을 들여 스키를 타러 갈까요? 평양의 고위층이라면 몰라도, 외국인 관광객보다 이용료를 싸게 해 준다고 해도 주머니가 무척 가벼운 대다수 주민은 스키장이 건설된 마식령을 '먼 산' 보듯 해야 합니다.

설령 주민에게 이용료를 싸게 해주더라도 도로사정이 열악하고 교통편이 미비한 북한에서 주민들이 어떻게 강원도 원산의 산골짜기의 스키장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스키장 이용료를 마련했다 해도 교통비가 겁나 엄두를 내지 못할 겁니다. 결국, 북한정권은 주민 체력 향상 구호와 달리 마식령 스키장을 건설해 외국인을 불러모아 달러를 벌 심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돈은 주민 복리보단 정권 유지에 쓰일 게 분명합니다. 애초에 '주민을 위한다'는 구호에 잠시나마 작은 기대를 걸었던 게 어수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