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정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짧은 헤어스타일과 복장을 흉내 낸 김정은.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의 짧은 헤어스타일과 복장을 흉내 낸 김정은.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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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관상 정치'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미국 동부 버지니아 주에 한인들이 비교적 많이 사는 센터빌이란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의 한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상영했습니다. 한국에서 한바탕 인기몰이를 한 영화이고 평론가들도 화제작이라고 해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보러 갔습니다. 영화 제목은 '관상'입니다. '관상'은 남한이든 북한이든 한민족에겐 매우 낯익은 단어입니다. 사람을 보면 관상이 좋다, 나쁘다 하며 뒷말하곤 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도 적어도 한 번쯤은 남의 관상에 대해 촌평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이처럼 관상은 한민족의 삶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남한에서는 사회가 발전하고 서구화하면서 관상에 몰입하는 게 전근대적이고 고리타분하다는 지적을 받지만, 그래도 관상에 대한 전통적 관심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영화 '관상'이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끈 것도 바로 이런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점점 개인의 능력과 도전, 그리고 성취가 중요시되면서 '관상'의 의미가 예전 같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살아가면서 가급적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함으로써 '좋은 관상'을 만들려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관상에 인생을 거는 일은 무모하고 허황합니다.

영화도 타고난 관상에 너무 얽매였다간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교훈을 던져주었습니다. 관상이 복잡다기한 인생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란 점을 영화는 전하고 싶은 듯했습니다. 바다에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밀려오는 파도의 '관상'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듯 우리 삶도 수많은 변수에 의해 움직입니다.

개인의 삶도 그러한데, 사회, 국가는 어떻겠습니까? 특히 국가의 지도자를 뽑을 때 그야말로 온갖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겁니다. 지구촌 대다수 나라는 그렇게 고민을 거듭해 지도자를 선택합니다. 영화 '관상'에서는 어린 왕의 삼촌을 왕이 되려고 역모를 일으킬 관상으로 설정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은 암투와 살상이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영화는 '관상 정치'의 폐해를 진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북한에서 희한한 얘기가 들립니다. 저희 방송이 최근 북한 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한 바로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이었음에도 관상이 좋아 지도자로 선택됐다고 합니다. 장유유서, 즉 어른을 존중하는 유교 전통이 사회에 많이 남아 있는 북한에서 장남이나 차남을 제치고 삼남이, 중소기업 사장이라면 몰라도 한 나라를 책임지는 지도자로 결정됐다는 것은 파격적인 조치입니다. 장남이나 차남보다 국가를 훨씬 더 잘 이끌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일입니다. 2천500만 주민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김정은이 지도자로 선택된 가장 큰 이유가 관상 때문이라는 대목에서는 한편의 희극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김정일이 후계자를 고를 때 "김정은이 김일성의 관상을 빼닮았다"는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그리했다고 합니다. 김일성 시절부터 중요한 국사를 논할 때 점쟁이들의 말을 참고했다고 하니, 후계자 선택 과정에서도 점쟁이의 의견을 들었을 겁니다. 나라의 정책을 논의하는 데 점쟁이를 개입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국가 지도자를 선택할 때 점쟁이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원시 부족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점쟁이들이 "김정은이 김일성처럼 나라를 부흥시킬 재목"이라고 침을 튀기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천문학적인 재산 피해를 줬습니다. 그리고 쇄국, 세뇌와 탄압으로 북한주민을 헐벗게 한 장본인입니다.

"김일성을 빼닮아서 지도자로 적격"이라는 말에 김씨 일가와 그 옆에서 아부하며 단물을 받아먹는 측근들은 "옳소" 하며 호응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뼛골이 빠지라 고생한 북한주민들이 과연 '관상으로 뽑힌' 지도자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낼지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