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 밖에서 일어나지만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박봉현의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친서’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지난 8일 저녁 함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구두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친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왕 부장은 김 위원장과 면담 후 다음 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왕 부장이 탄 비행기에 북핵 6자회담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동승했습니다. 두 사람이 바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두 나라의 핵심 외교관리가 같은 비행기에 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특히 김 부상이 왕 부장의 귀국길에 동행한 것은 내 집을 방문한 손님이 떠날 때 그 손님집까지 배웅하는 모양새입니다.
김 부상이 왕 부장을 대동해 중국행에 나선 것은 김 위원장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파격적인 조치입니다. 김 위원장이 후 주석의 구두 친서 내용에 심기가 불편했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김 위원장이 후 주석의 친서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음직 합니다.
왕 부장의 방북과 친서 전달에 이은 김 부상의 동반 중국행이 꼬일 대로 꼬인 북핵 정국에 무언가 낭보를 가져다줄 외교적 움직임으로 관측됩니다. 후 주석의 친서가 꽁꽁 얼어붙은 북핵 환경을 사르르 녹일 것이란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옵니다.
사실 김 위원장은 친서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4년 10월 김 위원장에게 처음으로 친서를 보냈습니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가로 경수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앞장서 조성하고 법적 행정적 제반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이 담긴 친서였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듬해 5월 두 번째 친서를 김 위원장에게 보냈습니다. 핵무기만 포기하면 대규모 재정지원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친서가 김 위원장에게 전달됐고, 김 위원장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답신했습니다. 오가는 친서로 양국관계에 순풍이 불어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방문이 성사됐습니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평양에서 김 위원장을 만나 클린턴 대통령의 세 번째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이 친서를 계기로 양국관계의 개선 방안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2007년 12월 방북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 친서를 들려 보내 박의춘 외무상을 통해 김 위원장에 전달했습니다. 역시 골자는 북핵이었습니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전면 신고할 것을 촉구한 친서였습니다. 그러나 친서가 전달되기 약 1년 전 북한은 이미 핵실험을 했습니다. 핵보유국에 한 발 다가선 김 위원장은 부시 대통령의 친서에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잘못 배달된 이웃집 편지인양 무덤덤하게 나왔습니다.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는 북핵 문제를 풀려는 미국의 의지와 노력의 결정체입니다. 완고한 김 위원장의 마음을 움직여 핵 위협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지속적인 친서전달로 나타납니다.
미국의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2009년 12월 방북해 김 위원장에 보내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를 강석주 제1외무성 부상에게 전했습니다.
통상 대통령의 친서가 그렇듯이, 오바마 대통령의 친서 내용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북핵 위기를 타개하려는 미국 정부의 뜻이 분명히 들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입니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일각에선 북한이 핵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오면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내용이 친서에 담겼을 것이란 분석도 있었습니다.
북한이 비핵화를 이행한다면 대규모 대북 경제지원과 같은 경제적 사안 외에도 한반도 평화체제와 미북 간 외교관계 수립과 같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일들도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친서에 스며 있다는 해석입니다.
북핵 대타결을 위한 외교에는 유엔도 가세하고 있습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북한에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린 파스코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은 특사자격으로 지난 9일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파스코 특사는 11일 김 위원장에 보내는 반 총장의 친서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건넸습니다.
파스코 특사는 방북기간 중 북한 고위관리들에게서 유엔 대북 제재를 해제할 것을 요구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파스코 특사는 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하고 회담이 구체적인 성과를 낳는다면 제재 해제를 검토할 수 있다는 언질을 줄 공산이 큽니다.
북한이 유엔제재로 당장 목조임을 당하는 상황이라, 김 위원장이 반 총장의 친서에 어떤 표정을 지을 지 지켜볼 일입니다. 김 위원장의 반응은 북한의 실상과 김 위원장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북한이 유엔제재에 끄떡없고 화폐개혁 후유증을 전혀 앓고 있지 않다면 김 위원장이 뻣뻣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 알려진 대로 북한이 유엔제재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화폐개혁이란 악수로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면 김 위원장은 국제사회가 뻗은 손길을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