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 밖에서 일어나지만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박봉현의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김정일-원자바오 회담'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1971년 3월 일본 나고야에서 제31회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에는 중국 선수단과 미국 선수단도 참가했습니다. 중국 선수단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이 대회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1960-70년대 중국은 구소련과 분쟁이 발생하자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중국 선수단은 미국 선수단을 의식해 예의범절까지 숙지하는 사전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해 4월 대회가 막을 내릴 무렵 중국은 친선경기를 하자며 미국 선수단을 중국에 공식초청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선수단 15명이 1949년 중국이 국가를 수립한 후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았습니다.
이어 헨리 키신저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비밀리 베이징을 방문해 주은래 중국 총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리처드 닉슨 미국대통령의 방중이 현실화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모택동 주석과 만나 국교를 수립하고 소련을 견제하는 연대를 형성했습니다.
일명 '핑퐁외교'로 불리는 탁구 외교는 20여 년간 냉랭했던 미국과 중국 관계를 녹이고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전기가 됐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요즘 핵 문제를 둘러싸고 핑퐁외교처럼 '공'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핑퐁외교의 원조인 미중관계에서는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다는 점이 지금의 미북 관계와 다르지만, 안보 문제의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정책 제안을 주고받는 상황은 비슷합니다.
지난 수개월간 미국과 북한의 외교전은 강경일변도였습니다. 북한은 미국이 핵 문제만 거론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완고하게 나왔습니다. 북한은 대화에 나서라는 국제사회의 요구에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 등으로 맞섰습니다. 이에 국제사회는 유엔제재 결의와 철저한 이행으로 응수했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미국은 북한을 어떻게든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 물밑작업을 쉬지 않았습니다. 중국으로 하여금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며칠 전 원자바오(온가보) 중국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김 위원장과 핵 해법을 논의했습니다. 회담 후 김 위원장은 "북미 양자회담의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6자회담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김 위원장의 제안에 중국을 비롯해 국제사회는 긍정적이면서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북한이 핵 문제를 풀기 위해 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고 한 점을 반기면서도, 북핵 사태가 단박에 물꼬를 틀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입니다.
북한은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어정쩡한 입장인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는 대신 중국의 대규모 지원을 받고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인식시켰습니다.
김 위원장은 양자 회담을 조건으로 달고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혀 미국에 '공'을 넘겼습니다. 미국의 태도를 보고 6자회담 복귀를 저울질하겠다는 심산입니다. 북한의 이번 발표는 다분히 대미협상용입니다. 급체를 확 뚫어줄 시원한 제안이 아닙니다. 여전히 기나긴 밀고당기기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6자회담 내 양자 대화 원칙을 고수해 6자회담에 중점을 두는 반면, 북한은 6자 회담을 양자회담의 후속 절차 정도로 간주하면서 미국과 담판을 노립니다. 미북협상이 잘 되면 6자회담은 이를 추인하는 자리로 그 위상이 추락하게 됩니다. 이것이 북한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북한이 6자회담이란 형식을 빌어 미북협상 결과를 인정받으면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상징성을 얻게 됩니다. 6자회담 참가국들이 김 위원장의 대화 제안을 반기면서도 '6자회담 틀 내에서'를 강조한 이유는 북한이 6자회담을 그저 '고무도장'정도로 여길 것을 우려한 때문입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을 옥죄는 대북제재 국면에서 원 총리와 회담을 통해 자신의 건재함을 대내외에 알렸습니다. 건강뿐 아니라 통치권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게다가 김 위원장은 자신의 삼남 김정은이 후계자란 점을 원 총리가 알도록 우회적으로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김 위원장의 제안이 '조건부 6자회담 복귀'이지만, 북한이 핵실험 후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자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며 으름장을 놓던 행태에 비하면 구두상으로나마 진일보한 것입니다. 앞으로 북한의 행동이 주목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북한의 태도에 따라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와 같은 대결국면이 '미국-중국간 핑퐁외교'의 모양새로 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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