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전망대] 알곡 전쟁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 밖에서 일어나지만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박봉현의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알곡 전쟁'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16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서양정치 철학의 토대를 확립한 저서 '리바이어던'을 썼습니다. 이 책은 '자연상태'라는 개념에서 출발했습니다. 홉스의 '자연상태'는 인간이 생존과 이익을 위해 만신창이가 돼 싸우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어지러운 상황입니다.

홉스는 이 혼란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모종의 '사회계약'이 절실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질서한 개개인의 무한투쟁 양상을 바로 잡으려면 개개인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강력한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홉스에게 '자연상태'는 하루속히 탈출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상태입니다. 공존공생보다는 흑백논리가 생존원리로 지배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홉스의 '자연상태'가 북한의 농장에서 재연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가 그토록 경계한 '자연상태'가 한반도 북녘땅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홉스의 '자연상태'는 북한 농장에서 벌어지는 '알곡전쟁'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북한에서는 요즘 추수가 한창입니다. 한해 고생한 결실을 거두는 신나는 때지만 농장원들은 알곡 도둑을 신경 써야 합니다. 추수를 도우려 농장에 온 젊은 학생과 군인들은 농장원들에게 박수를 받아야 하는데 되레 감시의 대상이 됐습니다.

농장원들은 순찰대를 조직해 봉사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지켜봅니다. 봉사 나온 학생과 군인들이 낮에 일하고 날이 어스름해지면 알곡을 훔쳐가니 어쩔 수 없습니다. 봉사자들은 알곡을 속옷에 몰래 숨겨가거나, 땅에 묻어두었다가 순찰대가 떠나면 다시 땅을 파 알곡을 가져갑니다.

알곡절취 사태가 심각해지자 북한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알곡도난 방지에 나섰습니다. 한동안 도둑의 손길이 뜸해지는가 싶더니 더 큰 도둑이 생겼습니다. 바로 순찰에 나선 무장군인들이 도둑으로 돌변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맡은 구역에 '작은 도둑'을 풀어 알곡을 훔치게 한 뒤 보호해준 대가로 그 일부를 상납받는다고 합니다. 불법영업 하는 유흥업주와 조직폭력배의 먹이사슬과 비슷합니다.

북한당국과 농장원들 간에도 생존싸움이 치열합니다. 당국은 농장에 알곡 추수 할당량을 정해줍니다. 흉작이라 해도 국가수매 양곡과 군량미는 그대로입니다. 일종의 성역입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양으로 분배를 하다 보니 결국 1년 동안 고생해 농사지은 농장원들에게 돌아갈 양곡이 줄어듭니다.

농장원들은 허탈해할 겨를이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스스로 도둑이 돼야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밤에 논에 나가 벼 이삭을 베 땅에 묻고 나서 추수가 끝나고 인적이 뜸해지면 거둬들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남의 생존과 안위를 돌볼 여유가 없는 상황에선, 홉스의 말대로 모두가 모두에게 잠재적인 적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가을 추수기의 북한 농장의 모습입니다.

철학자 홉스가 지금 북한농장을 견학한다면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리바이어던'의 실험장으로 삼으려 할지 모릅니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죽지 않는 거대한 동물입니다. 추수기의 무질서한 북한농장에 질서를 가져다줄 거대한 동물, 즉 '자연상태'의 국민을 통제하는 강력한 국가 말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이미 강력한 나라입니다. 내부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북한정부는 주민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실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므로 북한주민들은 홉스가 지적한 '자연상태'에서 빠져나와 넉넉한 안정을 누릴 법합니다. 그런데 농장에서의 알곡전쟁은 정반대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싸움이 난무하는 '자연상태'에 대한 치유책입니다. 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북한의 '리바이어던'은 비민주적이고 비효율적인 억압구조로 '자연상태'를 잉태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