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명 자유 없는 나라

남한 배우 김정은.
남한 배우 김정은.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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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작명 자유 없는 나라'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박근혜. 남한 일반 주민의 이름입니다. 저마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지어준 이름입니다. 금지옥엽 소중한 자녀를 평생 부를 이름인지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정한 이름입니다.

사람은 많은데 좋은 뜻의 글자를 고르다 보니 동명이인이 상당수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위에 열거한 이름의 동명이인 수는 열 손가락으로도 셀 수 없을 겁니다. 김씨, 이씨, 박씨 등 성씨를 구별하지 않고 이름 두 글자만 따지면, 동명이인은 몇 배로 늘어날 겁니다.

그런데 위 이름들은 남한의 전 현직 대통령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름은 태어나면서 주어지므로 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름은 개인과 가족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한 것이므로 장래 직업과 무관합니다. 출세한 사람의 이름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특정 이름에 대한 독점권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같은 이름에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도 있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점상도, 온종일 땡볕에서 밭을 가는 농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남한에는 김정은도 있습니다. 남한의 인터넷 검색사이트인 ‘네이버’에서 김정은을 입력하면 34명이 등장합니다. 네이버의 인물검색에는 비교적 지명도가 있는 사람들이 들어 있으므로 평범한 주민까지 합치면 동명이인의 수는 이보다 월등히 많을 겁니다. 김정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직업을 보면, 변호사, 가수, 교수, 축구선수, 요리연구가 등 다채롭습니다.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은 같아도 자라면서 소질과 적성을 살려 제 길을 개척한 결과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김정은이 이처럼 남한에 많습니다. 북한에도 이 이름이 적지 않을 것이란 상상을 해봅니다. 남한뿐 아니라 외국에서 최고지도자 이름이라고 해서 일반 주민은 쓰지 못한다면 이상하고 우스꽝스런 나라로 비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이런 희극적인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이름인 ‘정은’을 주민들이 쓰지 못하게 한 데 이어 최근 ‘정은’과 발음이 비슷한 ‘정운’과 ‘정훈’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앞서 말한 제한적인 네이버 검색 결과처럼, 남한에 김정은과 이름이 같은 사람이 수십 명이고, 이정은, 박정은, 최정은 등 성씨를 달리하면 수백 명이 넘을 것입니다. 거기에 정운이나 정훈처럼 발음이 흡사한 이름까지 포함하면 해당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겁니다.

독재자 김정은은 남한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김씨 성을 가진 남한사람들은 자녀의 이름을 ‘정은’으로 지으려다 한 번쯤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맘에 들면 그대로 지을 겁니다. 이름이 같아도 성씨가 다르면 독재자 김정은을 연상케 하지 않으므로 애초에 괘념할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녀 이름을 이정은, 박정은으로 하려 할 때 ‘정은’이란 이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김정은의 정은과 비슷한 정운이나 정훈으로 이름 지으려 한다면 성이 이씨나 박씨는 물론이고 김씨라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겁니다.

김정은은 국제사회에선 악명 높은 독재자로 인식되지만, 상당수 북한 주민에겐 지속적인 세뇌로 ‘위대한 지도자’로 각인돼 있습니다. 사회 지도자급 인사의 이름은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고려대상이 됩니다. 그러니 북한에서 ‘정은’이란 이름을 자녀에게 주고 싶어 하는 부모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은’이란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됐으니 정운이나 정훈 등 유사한 이름이라도 지으려는 부모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젠 그마저도 힘들어졌습니다. 정은은 고사하고 정운이나 정훈도 안 된다는 방침 때문입니다. 북한 당국은 한편으론 애민정책을 편다고 요란하게 선전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주민의 자유를 빼앗는 우민정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정은 또는 정은과 비슷한 이름을 짓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일반 주민 사이에도 있겠지만, 특히 김정은 정권의 버팀목이 되고 생사를 같이 하는 소수 특권층에서 많을 겁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은 이번 조치로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정권 다지기를 위해 곁에 두어야 할 사람들의 속을 긁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이름 짓기에까지 제약을 가해, 얼마 안 되는 지지층까지 수군대게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언론 자유가 없는 나라, 종교 자유가 없는 나라, 이동의 자유가 없는 나라로 불립니다. 여기에 ‘이름 짓는 자유가 없는 나라’라는 희귀한 이름을 더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