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비계도 없는 고깃국'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저녁으로 밥과 반찬 두 가지, 그리고 국으로 돼지고깃국이 나왔습니다. 고기가 들어가는 돼지고깃국이라 고된 생활엔 반가운 식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돼지고깃국엔 고기가 한 점도 없었습니다. 비누를 잘게 썬 것 같은 허연 비계가 서너 개 국에 둥둥 떠 있었습니다. 비계에서 우러나온 기름도 보였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대단했습니다. 고기 없는 돼지고깃국에 황당했습니다.
비계도 돼지의 일부이니 돼지고기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돼지고깃국, 하면 살코기를 생각하지, 이렇게 각설탕만 한 비계를 예상하진 않습니다. 물론 비계가 조금 들어가더라도 멀쩡한 살도 들어 있었더라면 고깃국이라고 명함 정도는 내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비계만 떠다니는 돼지고깃국은 고깃국이랄 수 없습니다.
이는 집이 없는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또는 친구 집에서 차려진 식단도 아니었습니다. 일반 식당에서 돈을 받고 파는 식사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 전 남한의 모 전방 부대 식당에서 나온 식사였습니다. 남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땐 군대에서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습니다. 지금은 남한이 개혁 개방을 거쳐 부유한 민주국가가 돼 이런 일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아련한 옛이야기거리에 불과하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나와 능력도 고만고만하고 노력도 비슷하게 했는데, 남이 더 잘 살 땐 배가 아픈 게 사람의 본성입니다. 하물며 내 노력과 능력에 관계없이 밖에서 거저 주어지는 것에서 남과 현저한 차이가 있을 땐 분노하게 됩니다. 내 것을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기분이 듭니다. 내 생활이 여유로와 그까짓 것 신경 쓰지 않겠다면 그만이지만, 내 사정이 팍팍하면 울화가 치밉니다.
북한 주민의 생활은 힘듭니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자주 식량을 보냅니다. 배부른 당 간부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쌍한 주민들을 위해섭니다. 정권 유지에 필요한 세력에게 선심을 쓰는 게 아니라 정치에 무관한 일반 주민에게 나누라고 주는 것입니다.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은 북한 주민의 허기진 배를 완전히 채우진 못해도 굶어 죽는 일을 막고 만성 영양실조를 치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돼야 합니다. 북한당국이 국제사회의 지원을 깨끗하게 주민에게 나누어주면 충분치는 않아도 매우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북한은 유엔이 권고한 1인당 하루 필요량 573그램을 채우기는 어렵더라도 3분의 2 수준에는 근접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북한 당국의 주장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 주민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다소 안도할 수 있습니다. 식량문제가 점진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평양시민, 군 장교, 당 간부, 보위부, 보안부, 그리고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배급을 받지만, 국민 전체로 따지면 그 수는 미미합니다. 그리고 일반 주민의 경우, 김정일의 고향이라는 양강도 삼지연군, 김정일의 모친 김정숙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시, 김일성 별장이 있는 평안북도 향산군 정도에 살아야 제대로 배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무역기관이나 공장들도 배급을 받지 못해 자체 사업으로 남긴 이익금 일부로 중국에서 쌀을 사다 먹고, 교원이나 의사들도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국제사회의 지원과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배급, 그리고 실제 주민에게 돌아간 배급 사이엔 너무도 큰 틈이 존재합니다. 지원이 정작 지원받아야 할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일입니다. 중간 역할을 해야 할 북한 당국이 제 편의대로 지원식량을 사용하는 까닭입니다. 투명하지 않는데다 정치적 의도를 깔고 배급을 하니 순진한 주민들은 번번이 당해도 하소연할 데가 마땅치 않습니다.
‘도박’에 눈이 멀어 가산을 탕진하고도 이웃이 준 도움마저 또 ‘도박’에 써버리는 게 북한 당국의 모습입니다. 가족을 내팽개친 정신 못 차린 가장과 같습니다. 돼지고깃국에 살코기는 고사하고 비계도 넣어주지 않는 가장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