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시찰 알레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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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현장시찰 알레르기'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듯이, 백 번 들어도 한번 보는 것보다 못합니다. 금강산 관광이 한창일 때 남한 사람들이 앞다퉈 국경을 넘은 것도 ‘세계적인 명산’이라고 수없이 들어온 금강산의 풍광을 산속에 들어가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경험해야 금강산의 참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도 현장을 두루 다닙니다. 육아원에 가서 어린이들을 안아주면서 말을 겁니다. 놀이공원이나 스키장에 가서 건설노동자들에게 속도전을 다그칩니다. 공장에 가서 근로자들에게 생산량을 배가하도록 독려합니다. 김정은은 군부대에도 갑니다. 평소엔 느긋하게 부대 내에서 왕 노릇을 하던 부대장이 훈련소에 갓 들어간 신병처럼 꼿꼿하게 서서 김정은의 지시를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정신 집중해 받아 적습니다.

김정은의 현장 시찰은 전방위로 진행됩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를 날면서 건설현장을 둘러보고 자기 생각을 거침 없이 토해냅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전국 곳곳을 돕니다. 이뿐 아닙니다. 배와 잠수함을 타고 바다도 누빕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보다 현장 시찰 폭이 넓습니다.

북한 매체는 이런 현장 시찰을 대서특필하고 온갖 미사여구로 김정은을 치켜세웁니다. 독재자 김정은의 현장 시찰은 애민 정책의 하나로 포장됩니다. 주민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애환을 직접 듣고 본다는 겁니다. 김정은으로서는 사회 구석구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현장 관계자들이 김정은의 방문을 앞두고 사전에 보여주기 식 준비에만 골몰한다고 해도 현장에 가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김정은의 현장 시찰과 자유세계 지도자의 현장시찰을 애민정책의 진정성이란 측면에서 동일시하긴 어렵지만, 그렇더라도 현장 시찰의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수많은 현장 시찰을 그리 중시하면서도 유독 한 가지 현장 시찰엔 그토록 차갑게 대합니다. 지난주 미국 워싱턴DC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열린 북한인권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북한당국이 인권 실태 파악을 위한 국제 조사단의 방북을 허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 인권 참상이 알려졌지만, 북한이 완강하게 부인하니 현장 조사를 하는 수밖에 없다며 문을 열라는 겁니다. 인권 참상 증언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지만 직접 현장을 보면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취지에서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듣는 둥 마는 둥 합니다. 북한은 자국 내에 인권유린이 없는데 외부에서 잘못된 정보로 인권 참상을 운운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실 규명 차원에서 국제 조사단을 불러들여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의혹이 사라질 텐데 그리 하지 않습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숨기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김정은의 현장 시찰은 국내 문제이고, 북한 인권도 국내 문제이므로 국제조사단이 현장 조사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북한 인권 문제는 더는 북한 국내 문제가 아닙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이 남한을 포함해 미국, 캐나다, 유럽, 중국, 동남아에 정착했습니다. 이들이 쏟아낸 증언으로 공론화한 북한 인권 문제는 국제적인 사안입니다.

북한의 유엔대표부 차석대사는 북한인권토론회 참석을 요구했고 주최 측은 절차를 밟으면 수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측은 이를 진행하지 않았고 결국 토론회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북한 측이 애초에 토론회 참석할 의향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토론회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이 토론회는 민간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이며 미국 정부와 관계가 없습니다.

국제사회의 믿음이 진실을 뒤튼 편견이라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장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게 하면 됩니다. 김정은이 빈번하게 다니는 현장 시찰을 국제조사단에도 허용하면 됩니다. 그런데 북한은 방북 제안 얘기만 나오면 발끈합니다. 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는데 말입니다. 국제조사단이 북한 땅에 절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가 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