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광개토왕과 김정은’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북한사회과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재일동포가 최근 영문 매체인 아시아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과 고구려 광개토왕을 비교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광개토왕은 고구려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남한 사람들에게도 위대한 왕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기고문은 광개토왕과 김정은이 네 가지 점에서 닮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로 태어난 시점이 1천600여 년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김정은을 광개토왕과 견준 것은 흥미로운 시도였습니다. 두 사람이 어디가 어떻게 닮았다고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기고문은 우선 두 사람 모두 어린 나이에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됐다는 사실을 공통점으로 꼽았습니다. 광개토왕은 서기 391년 17살 때 왕위에 올랐고, 김정은은 20대 후반에 북한 권력의 일인자가 됐습니다. 김정은의 나이가 불분명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세상 물정 모를 때 권력을 움켜쥔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어려서 최고 권력자가 됐다는 사실이 자랑할 만한 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정은의 출생연도가 1984년이란 설이 있고 1982년이란 설도 있지만, 어찌 됐든 복잡다단한 현실 정치를 파악하기엔 너무 어립니다. 또한 광개토왕 때는 전제군주제였으므로 나이에 상관 없이 태자가 보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므로 김정은이 광개토왕처럼 어려서 최고권력자가 됐다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북한이 고구려처럼 아직도 전제군주제를 고수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셈입니다.
둘째, 이 기고문은 광개토왕이 영민한 군사지도자로서 원로 군 지도자들과 신하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백성을 자식처럼 아꼈다는 부분이 김정은과 닮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광개토왕은 한민족의 영토를 만주까지 확대해 후세로부터 광개토대왕으로 불립니다. 백성으로 하여금 자긍심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니 광개토왕의 치세는 지도자들이 본 따고 싶은 대목입니다. 그래서 이 기고문이 김정은을 여기에 끌어들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정은은 단 하루도 군대 생활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대장이 됐습니다. 별 하나만 달아도 주변에선 입이 떡 벌어질 텐데 말입니다. 아마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특급 승진인사일 겁니다. 북한 당국이 급기야 최고사령관 칭호까지 부여하면서 김정은 띄우기에 혈안이 돼 있지만, 일반 주민은 물론이고 간부들도 과도한 우상화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이 기고문은 김정은이 하늘이 내린 백성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외세의 침략을 단호히 물리칠 태세가 돼 있다면서 광개토왕과 동일시했습니다. 광개토왕은 민심이 천심이란 점을 가슴에 새겨 나라의 자주독립에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외치와 내치를 균형 있게 한 군주였습니다.
북한 매체가 새 지도자 김정은이 백성을 하늘처럼 여긴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외쳐대지만, 과연 북한 주민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는 청취자 여러분이 매일매일 피부로 확연히 느끼실 겁니다. 김정일 정권 때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도 정권은 나라의 문을 꼭 닫고 체제유지에만 급급했으며, 김정은 정권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되레 북한 매체는 틈만 나면 한국과 미국을 ‘호전광’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후 62년이 흘렀지만, 대량살상 무기로 위험한 불장난을 지속해 온 것은 북한 정권뿐인데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고문은 광개토왕이 만주, 몽골,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해 거대한 고구려를 만든 것처럼 김정은도 북한에 황금기를 가져올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설마 김정은이 광개토왕처럼 군사를 일으켜 한국을 공략하고 만주와 시베리아로 진주할 것이란 뜻은 아닐 겁니다. 김정은이 북한을 부흥시키고 세계에서, 아니 적어도 동북아시아에서 인정받는 나라가 되길 바라는 의미에서 광개토왕과 김정은을 나란히 놓고 본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은 세계화가 대세입니다. 영토를 확장해 국력을 과시하는 시대가 아니라 그 나라의 경제력, 정치력으로 국제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신망을 쌓아가는 시대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라의 문을 활짝 열고 이웃 나라들과 진실하게 소통하고 역동적으로 교류하는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이 바로 북한이 강성대국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에서도 이런 희망의 빛 줄기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기고문이 김정은을 광개토왕에 빗댄 것은 어느 하나 설득력 있게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동일시할 수 있는 소재가 하나 있긴 합니다. 광개토왕과 김정은은 모두 최고권력자이지만 칭호가 여럿 있습니다. 광개토왕은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 광개토경평안호태왕, 광개토지호태왕, 광개토지호태성왕 등의 칭호를 가졌습니다. 김정은은 최고사령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대장, 최고령도자 등으로 불립니다. 조만간 여기에 당 총서기 등 한두 개의 직함을 더 갖게 될 전망입니다. 그러니 기고문이 두 사람의 호칭이 많다는 점을 비교 목록에 넣었더라면 그나마 체면치레는 했을 겁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