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금’ 투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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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통치자금 투자처'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미국사람들에게 ‘남한 제품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뭐냐’라고 물으면 상당수가 현대 자동차와 삼성 텔레비전이라고 답합니다. 현대와 삼성은 남한에서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남한을 대표하는 기업입니다. 현대 자동차와 삼성 텔레비전은 남한 상품이라는 경제적 의미에 머물지 않고 남한 전체의 상징물처럼 됐습니다.

현대자동차는 1985년 ‘엑셀’이라는 승용차를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그 후 그랜저, 소나타 등 여러 종류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수출했습니다. 현대자동차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자동차를 수출하는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고 남한의 위상도 높였습니다. 수출 초기엔 지명도가 낮아 고전했지만, 품질향상에 주력하고 경쟁력 있는 가격을 제시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게 됐습니다. 실제 운전하다 보면 주변에서 현대 자동차 마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성 텔레비전은 1978년 미국 시장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은 일본의 소니 제품이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업계에서는 남한이 추격해도 일본의 아성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관측했었습니다. 하지만, 삼성은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고급인력 활용으로 일본 텔레비전을 제압했습니다. 미국 대형전자상점에 가면 삼성 텔레비전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매장의 텔레비전 판매대를 독차지하다시피 합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일본 소니 텔레비전의 독무대였던 텔레비전 판매장이 이젠 삼성 텔레비전 전시장처럼 바뀌었습니다. 권투로 말하면 일본 소니 텔레비전에 큰 거 한 방 먹인 셈입니다.

현대와 삼성은 제품을 외국시장에 내놓기 전에 먼저 국내시장을 다졌습니다. 국내 소비자들에게 인정을 받은 후에 한결 까다로운 세계시장을 두드린 것입니다. 국내에서 홀대받는 제품이라면 다른 나라에 팔기 어렵겠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현대 자동차와 삼성 텔레비전은 외국시장을 개척하기 전에 국내시장을 석권했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작은 나라가 살길은 수출확대입니다. 남한은 일찌감치 방향을 잘 잡아 매진한 덕에 경제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북한 지도자 김일성, 김정일의 쇄국정치로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김정은이 최근 흥미로운 발언을 했습니다. 노동신문 30일 자 논설을 보면, 김정은이 얼마 전 류원신발공장을 방문해 국산품의 세계화를 강조했다고 돼 있습니다. 논설은 이어 ‘우리 세대가 과연 세계를 압도하는 조선의 인기상품을 내놓지 못한단 말인가?’라며 수출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습니다. 북한이라고 못할 일이 아니지요. 남한이 걸어온 길을 교훈 삼아 노력하면 훗날 가능할 겁니다.

외국시장에서 인정받으려면 품질이 우수하고 가격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국내 시장에서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당국이 최근 국산품 애용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수입품을 배척하고 국산품을 애용하라고 압박하면 국내에선 많이 팔릴지 모르지만, 쉽게 팔리는 만큼 품질개발엔 소홀해지게 마련입니다. 북한처럼 획일화한 사회에서 당국의 압력과 지시가 내려지면 주민들은 마지 못해 국산을 살 것이고 생산공장 입장에선 ‘땅 짚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개발하지 않아도 잘 팔리는 데, 계획경제 체제하의 북한 공장에서 무엇 때문에 연구에 투자하겠습니까?

국내에서 잘 팔린다 해도 진정으로 품질이 좋아서라면 또 다른 얘기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국산 대부분이 중국 제품을 껍데기만 바꾼 것이란 게 주민들의 말입니다. 그리고 가격은 대체로 중국산보다 비쌉니다. 결국, 북한 무역회사와 공장들만 쉽게 돈벌이할 수 있게 하고 주민들은 품질 낮은 제품을 비싼 값을 치르고 사는 기현상이 빚어집니다. 이런 제품을 국산품 애용 차원에서 사준다 한들 외국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겠습니까?

국산품 애용 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진짜 북한산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을 외면한 당국의 무리한 국산품 애용 운동에 대해 ‘민주를 사랑하자’라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민주’는 백성이 마시는 술, 즉 민가에서 불법으로 만드는 술을 말합니다. 제대로 된 북한산은 밀주밖에 없으니 밀주를 사랑하자는 비아냥거림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행정을 꼬집는 말입니다.

노동신문 논설이 강조했듯이 북한이라고 인기상품을 내놓지 못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북한은 외국시장에 내놓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고민한 뒤 아낌없이 투자해야 합니다. 회사나 주민들은 ‘우리에게 그런 돈이 어디 있느냐’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북한 회사나 주민에겐 이런 돈이 없습니다. 하지만, 김정은의 금고엔 돈이 넘칩니다. ‘통치자금’으로 쌓아둔 이 돈을 북한 특산품 개발에 과감히 쏟아 부으면 경쟁력을 갖춘 수출 상품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수출상품을 개발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통치가 또 무엇이겠습니까?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