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당 제1비서’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북한전문가들이 11일 열린 당 대표자회에서 이러한 칭호가 공식화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전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비웃듯 당 대표자회는 ‘김정은 당 총비서’ 대신 ‘김정은 당 제1비서’를 공표했습니다.
당 대표자회는 김정일을 ‘영원한 당 총비서’로 추대함으로써 당 총비서 자리를 김일성이 무덤에 안고 간 ‘국가주석’ 칭호처럼 아무도 넘보지 못하게 하고 미라처럼 영구히 보존하려 합니다. 당 우위의 북한 사회에서 당 총비서 직에 최고의 권위가 부여돼 그런가 봅니다.
김정은은 당 총비서 대신 당 제1비서에 그쳤습니다. 당 제1비서 위에 실존 인물이 없으니 당의 1인자임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당 총비서는 아닙니다. 실권을 쥐고 있다고 하지만 북한사회에서 당 총비서가 갖는 위상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본인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외부세계 전문가들의 전망보단 한 단계 아래의 직급에 머물렀습니다.
당 대표자회가 김정은을 당 총비서 대신 제1비서로 추대한 배경을 풀이하는 데 전문가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아직 북한사회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반증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김정은이 총비서가 되지 못한 것을 권력구도의 불안정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리 있는 분석입니다.
하지만 김정은이 당 총비서로 공식 추대되지 않았다 해서 움츠러들 리 없습니다. 당 제1비서라도 당 총비서가 공석인 상황에서 김정은은 실질적인 북한 최고 권력자입니다. 당 내에서 어느 누가 감히 김정은에게 대들 수 있겠습니까?
북한 권력구도를 보는 외부의 눈은 체제의 변화 가능성에 모여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김정은이 당 총비서가 되든 제1비서가 되든, 지금과 같은 김씨 일가의 독재체제를 그만 거두고 국제사회의 떳떳한 일원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김정은의 당 제1비서 추대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북한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당 정치국, 비서국, 중앙군사위원회에는 김정일 세대가 수두룩합니다. 김정은의 아버지뻘 되는 원로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이들을 대폭 물갈이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적어도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 그래야 할 겁니다. 제1비서란 직책을 수락한 것도 당내에 포진해 있는 원로들에 대한 겸양의 표시라는 겁니다. 일정 기간 이들의 지지가 필요하므로 서로의 공생을 위해 마련한 계책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중국 공자의 유교 사상을 발전시킨 맹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로 ‘장유유서’란 말을 했습니다. 상 하의 위계질서가 유지돼야 사회가 올바로 선다는 뜻입니다.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만다는 경구입니다. 상 하 위계를 엄격히 따지는 북한 사회에서 통할 수 있는 말입니다. 김정은이 당 제1비서로 만족한 것은 당 총비서를 아버지의 영원한 직함으로 남겨두려는 점도 있겠지만, 당내 원로들을 ‘어른 대접’하려는 포석도 깔려있습니다. 원로들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고 나라를 이끌겠다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입니다.
김정은은 김씨 일가의 세습독재를 보전해야 하고, 등 따뜻하고 배부른 당 원로들은 기득권을 유지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뭉쳤습니다. 한마디로 김정은과 권력 실세들이 ‘체제유지’라는 공동목표에 일심동체임이 이번 당 대표자회에서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북한체제는 왕조시대에나 있을법한 3대 세습 독재입니다. 당 대표자회가 김정은을 당 제1비서로 추대한 것은 현 체제를 아무런 손상 없이 이어가자는 의도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렇다면 김씨 일가의 세습독재는 4대, 5대로 면면히 이어질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가능합니다. 이 전망이 현실화할 때 민생이 얼마나 더 피폐해질 것인가는 불 보듯 뻔합니다.
김정은이 이번 당 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로 추대돼 명실상부한 최고권력자로서 등극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해봅니다. 냉전시대의 사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구시대 인물들을 몰아내고, 바깥세상에 눈을 뜬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외부세계와의 교류를 점차 넓혀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