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반갑지 않은 독서장려'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분서갱유.’ 책을 불사르고 유학자들을 땅에 묻어 죽인다는 뜻입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2200 여 년 전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의 철권통치의 한 정책이었습니다. ‘분서갱유’ 가운데 유학자들을 죽였다는 ‘갱유’에 대해선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어 제쳐놓고 ‘분서’만 보더라도, 책을 읽지 못하게 불살라버렸다니 글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밥상에서 밥그릇을 송두리째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진시황은 의학이나 농업 서적을 제외하곤 자신의 정책과 다른 견해를 담은 글을 모조리 소각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당시 변변한 언로가 없었으니 ‘분서’ 정책은 학문의 자유와 일반 주민의 알 권리를 박탈한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특정 국가의 정권이 자기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일부 서적 출간을 금지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격이지요. 게다가 이 일로 말미암아 학문 발전에 큰 지장이 초래됐고 중요한 역사 기록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역사학자는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진시황이 귀중한 책들을 무더기로 불살라 버린 것을 두고두고 책망했습니다.
책을 태워버리는 ‘분서’ 정책은 손가락질을 당하지만, 책 읽기를 권장하는 ‘독서장려’ 정책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반길 만합니다. 주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독서를 통해 유익한 정보를 얻고 교양을 높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독서는 자기 나라 사람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가치관을 따르고 있으며 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영위하는지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를 통해 지금껏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으로 ‘마음의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서는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독서장려 정책이 박수를 받는 이유이지요. 남한에서는 주민들이 여러 분야의 좋은 책들을 자유롭게 읽어 마음의 양식을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한 가지 견해에 몰입하다 보면 편향된 시각을 갖게 되므로 가능하면 다양한 의견을 고루 접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노력합니다. 남한 정부도 각종 독서장려 정책을 펴 이를 측면 지원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독서장려 운동이 일고 있습니다. 며칠 전 노동신문은 ‘전 사회적으로 책 읽는 기풍을 철저히 확립하자’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습니다. 노동신문의 성격을 고려하면 이는 노동당의 방침, 김정은의 방침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겁니다. 사설은 “책 읽기를 생활화, 습성화”하자고 했습니다. 또 “일생 동안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오늘날 지식의 저장고인 책을 읽지 않고서는 발전하는 시대에 따라갈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세계화 시대에 개인과 사회, 나라가 뒤처지지 않으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점을 북한 당국도 깨달은 듯합니다. 지방 주민들도 손쉽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전역 시, 군에 하나 둘 전자도서관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북한의 독서장려 운동은 남한이나 다른 민주사회의 유사한 운동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신문 사설은 독서장려와 관련, “제국주의반동들을 사상정신적으로 타승하고 최후승리를 앞당겨나가자는데 그 주되는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김일성-김정일의 혁명서적에 대한 학습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북한당국의 독서장려는 김씨 일가의 세습체제를 영원히 이어가려는 정책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이, 책에 기록된 모든 사상, 이념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주의에 부합해야 한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비켜가면 가차 없이 내쳐집니다.
북한에서 독서는 정권이 정해놓은 지침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 틀을 벗어나면 반사회주의적 분파 행동으로 매도됩니다. 이런 점에선 진시황의 분서 정책보다 더 섬뜩합니다. 진시황의 정책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개진한 서적을 태워 공부하지 못하게 한, 어찌 보면 소극적인 대처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은의 독서장려 운동은 보다 적극적입니다. 김씨 세습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서적을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세습독재를 정당화하는 책을 평생 공부하라고 채찍질하고 있는 겁니다.
북한당국은 오래 고여 더러워진 웅덩이 물을 생명수라면서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평생 마시라고 순진한 주민에게 강요합니다. 바깥세상에는 청정한 물이 콸콸 넘치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