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체제우월성 입증할 호기'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는 여름에 얼룩말, 영양, 들소 등 수백만 마리의 초식동물이 떼로 이동합니다. 사는 곳에 물이 마르면 촉촉한 초원을 찾아 무리 지어 터전을 옮깁니다. 이들의 대이동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이들의 대이동은 목숨 건 여정입니다. 사자나 치타와 같은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기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 없으니 대이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멀고 험한 길을 떠나는 이 동물들에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는 포식자들은 새 삶의 터전을 찾지 못하게 막고 생명마저 빼앗는 소름 돋게 하는 존재입니다.
최근 고아 9명이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라오스에 들어갔다가 불심검문에 적발돼 결국 강제 북송되고 말았다는 보도가 전해졌습니다. 불법으로 월경한 것이 드러나 라오스 경찰에 체포됐지만, 이들의 북송에는 북한 요원의 개입이 확연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먼 거리를 이동한 탈북 고아들이 호시탐탐 이들을 노린 북한 요원에 목을 물린 형국입니다.
북한이 이들을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지만, 라오스 주재 한국대사관을 따돌리고 전격적으로 이들을 북송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탈북 계획을 세우고 있는 다른 주민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일벌백계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남한으로 가려 했고 선교사와 동행했다는 점을 들어 엄중하게 벌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남한 측의 꾐에 빠져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식의 기자회견을 할 요량인지도 모릅니다. 하기야, 탈북한 뒤 남한에 살다가 최근 다시 북한으로 간 주민들을 기자회견장에 앉혀놓고 남한사회의 저급함과 북한사회의 우월함을 거짓 선전하는 것을 보면 북한이 이들 고아도 얼마든지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체제경쟁은 다양한 잣대로 할 수 있습니다. 국민 소득, 경제 규모, 평균 수명과 같이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통계수치가 보편적으로 활용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체제 구성원 개개인이 내리는 평가입니다. 개개인에게 물어보아야 진정으로 우월한 체제를 가릴 수 있습니다.
북한이 이번에 탈북 고아들을 강제북송하기 전에 이들을 직접 만났고, 그 후에 비행기에 태워 북한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탈북 고아들을 만나 북한으로 데려간 것이 고아들의 뜻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죽을 각오로 북한을 탈출한 고아들이 제 발로 북한으로 갔을 리 만무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북한은 그들이 말하는 체제 우월성을 과시할 소중한 기회를 잃었습니다.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 등 매체를 통해 눈과 귀가 따갑도록 강조한 북한의 체제 우월성을 객관적으로 실증할 호기를 놓쳤습니다.
북한 요원들은 탈북 고아들이 체포됐다는 정보를 얻은 뒤 신속하게 움직여 이들을 만나 조사를 했습니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남한 측은 완전히 배제됐습니다. 북한 측이 남한 측에 연락하거나, 라오스 당국으로 하여금 남한 측에 연락하도록 해 탈북 고아들을 함께 면담하고 서로 자국으로 갈 것을 독려했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탈북 고아들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고향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면 북한이 체제경쟁에서 깨끗하게 한판 승을 거두었을 겁니다.
그러나 북한 측은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한국 측에 알리기는커녕 라오스에서 출발해 중국을 거치면서도 중국 측에까지 쉬쉬하는 ‘비밀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적국의 요인을 납치하듯 쥐도 새도 모르게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나 봅니다. 만일, 공개 면담에서 탈북 고아들이 남한으로 가겠다며 남한 측 관계자의 품에 안길까 두려웠을까요?
하지만, 아직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북한이 탈북 고아들을 데려온 라오스에 탈북 고아 9명을 다시 데리고 가서 남한 측과 동시에 면담하고 이들이 솔직하게 선택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리고 세계 언론을 많이 불러모아 투명하게 하는 겁니다. 이 자리에서 탈북 고아들이 북한을 선택하면, 북한은 비교적 손쉽게 체제 우월성을 만방에 과시할 수 있을 겁니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에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선전해야 하는 수고도 덜 수 있을 겁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