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황병서 심리학'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중국에는 차와 말을 교역한다는 의미로 이름 붙여진 차마고도라는 길이 있습니다. 해발 4천미터가 넘고 험준한 차마고도는 티베트, 인디아, 파키스탄 등지로 이어지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무역로로 남한 텔레비전에서 특집 방송을 하기도 해 이곳을 관광한 남한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기암절벽의 좁은 길을 걸을 땐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오싹하며, 발을 헛디디면 끝이 안 보이는 천 길 낭떠러지로 고꾸라져 황천길로 직행합니다.
차마고도의 가장 좁은 길의 폭을 1미터라고 치고, 운동장에서 폭 1미터 되게 하얀색으로 두 줄을 100미터 정도 그립니다. 100미터 달리기경기 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그리고 출발선에서 걷기 시작합니다. 눈을 감고 걷거나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한 게 아니라면 100미터를 편안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폭의 좁은 길인데 차마고도와 운동장에서의 걷기가 이처럼 현저하게 다른 이유는, 차마고도에선 자칫하다간 시신도 못 찾는 횡사 가능성이 열려 있고 운동장에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협곡을 빠져나갈 때까지 내내 공포에 갇혀 걸어야 하는 차마고도와 달리 평지의 길은 설령 차마고도보다 폭이 더 좁아도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합니다.
그런데 절벽이 없고 좁지도 않은 평지에서 한시도 긴장의 고삐를 느슨하게 할 수 없는 희한한 경우가 있습니다. 한 걸음이라도 무신경하게 내디뎠다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그럴 만합니다. 북한 권력 2인자로 꼽히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의 걸음걸이가 이를 입증했습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황병서이지만 김정은과 함께 있을 땐 비무장지대 부대의 보초처럼 완벽한 경계태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황병서는 최근 ‘인민군 제5차 훈련일꾼대회’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자리에 김정은을 수행했습니다. 환한 모습으로 김정은 오른쪽에서 걷던 황병서는 갑자기 몸을 뒤로 빼 몇 걸음 물리고는 김정은 뒤쪽으로 숨듯이 움직였습니다. 올해 66세의 노인에게 걸맞지 않은 재빠른 행동이었습니다. 행사 참가자 중 한 군인이 김정은에게 꽃다발을 건네려는 순간, 황병서는 자신이 김정은보다 한 걸음 정도 앞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사적인 동작을 보인 겁니다. 화롯불을 만졌다가 ‘아 뜨거워’ 하며 손을 빼듯 민첩했습니다.
얼마 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은이 연설하는 자리에서 졸았다는 이유 등으로 숙청되고 상당수 당 고위 간부들이 불경죄로 찍혀 파국을 맞는 것을 본 황병서로선 지극히 당연한 뒷걸음질이었을 겁니다. 남들이 보기엔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황병서에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심각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특히 간부 숙청에 긴밀히 간여해 온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라는 핵심의 위치에 있었으니 북한 권력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병서였을 테니까요.
며칠 전 북한 관영 조선중앙TV에 나온 5초 정도의 이 장면은 아니나다를까 남한 언론이 앞다퉈 보도했고 장안에 화젯거리가 됐습니다. 아주 짧은 희극을 보는 것 같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도 올라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북한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이 동영상을 보면, 김정은 옆에서 걷던 사람이 왜 갑자기 김정은 뒤로 갔는지 영문을 모를 겁니다. 김정은에게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 나면, 북한을 수수께끼 가득한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이해할 수 없는 나라’로 여길 겁니다. 북한을 비교적 잘 아는 사람들은 ‘정말 못 말리는 나라’라며 혀를 찰 겁니다.
누가 뭐라 해도 황병서에겐 자신의 생존보다 중요한 게 없을 겁니다. 이 화면을 보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비웃더라도 개의치 않는 눈치입니다. 번쩍이는 계급장을 단 ‘역전 노장’이라도 사복을 입은 김정은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 신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 보입니다. 잡혀 먹히지만 않는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세로 머리를 조아리는 쥐처럼 말입니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빈다고 하지만, 황병서에게선 설령 그런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도발적인 행동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남이 뭐라 한들 김정은 앞에선 영원히 고양이 앞의 쥐처럼 살겠다는 결연함마저 느껴집니다.
김정은을 수행하는 황병서는 넓은 평지를 걷더라도 차마고도의 절벽 길을 걷는 것보다 더 조바심이 날 겁니다. 만일, 황병서와 고위 간부들이 김정은과 평지에서 걸을 때 여유롭고 당당해 보이면 북한이 변하고 있다는 의미 있는 징표가 될 겁니다. 그런데 김정은의 행태를 보면 그때가 언제쯤 올 지 전혀 가늠되지 않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