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의 구두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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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유치원의 구두발자국'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대여섯 살밖에 안 된 북한 어린이들이 작은 발에 양말을 신은 채 유치원 바닥에서 종종걸음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벅저벅’ 하는 둔탁한 소리가 바닥을 울립니다. 시꺼먼 구두발자국 소리입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구두발자국 소리입니다. 여기에 동행한 측근들의 구두발자국 소리가 더해졌습니다. 장판이 깔린 바닥에 어울리지 않는 구두발자국 소리입니다.

얼마 전 김정은이 측근들을 대동하고 한 유치원을 방문했습니다. 최고 지도자로서 미래의 ‘꿈나무’인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고 그랬나 봅니다. 어린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려면 우선 어린이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처럼 구두를 벗었어야 했습니다.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신발을 벗게 한 것은 그것이 어린이의 건강과 교육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이 이 정도 상식도 없었을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내가 체면 구겨지게 어린이들처럼 양말만 신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을까요?

자신은 왕이나 다름없으니 구두를 벗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유치원의 어린이들을 위한 행동은 아닙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준 게 아니라,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신발을 벗어도 최고지도자나 그 측근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의식을 가르친 셈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몰상식한 행동이라도 힘만 있으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측근 가운데 혹 구두를 벗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김정은에게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혼자서 조용히 구두를 벗을까 하고 생각한 측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구두 신은 김정은을 은근히 꼬집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어, 못이기는 척하며 구두를 신은 채 김정은을 따라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런 일을 하도 많이 겪어 도덕 불감증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결과는 같습니다. 측근 누구도 바른 소리를 하지 않았고 마치 폭력배처럼 구두를 신고 우르르 유치원에 진입했습니다. 사실 권력에 취한 김정은이나 측근에게 바른 생활을 바라는 게 비현실적이라 여겨집니다.

김정은과 측근들을 맞은 유치원 선생님들도 미소를 지을 뿐 “구두를 벗으세요”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히 입도 뻥긋 못 했습니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의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 불경스런 발언이라면, 헝겊 주머니로 구두를 감싸주었으면 어땠을까요?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나마 어린이들을 배려하는 지도자로서 체면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유치원에서 들리는 김정은의 구두발자국 소리는 그가 어린이는 물론이고 주민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는지 알아차리게 합니다. 이런 지도자가 어떻게 주민의 비통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 아파하겠습니까?

구두를 벗어야 하는 장소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규정에 따라야 합니다. 권력과 힘에 따라 규정을 달리 적용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확대 해석하면, 북한에서 법이 제대로 적용되고 집행되지 않는 게 수긍이 갑니다. 최고지도자의 말이 바로 법인 사회에서 준법은 약자에만 강요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문화를 충분히 익혔을 것이란 기대는 애초에 김정은에게 걸 것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수많은 북한 주민의 인권도 유치원에서 울리는 김정은의 구두발자국 소리와 무관치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탈북하다가 잡혀 모진 고생을 하는 주민의 신음, 합당한 절차 없이 처형당하는 주민의 비명이 유치원에서의 구두발자국 소리와 뒤엉킵니다. 북한에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죄목이 24개나 된다고 하는데 과연 죄를 입증하는 과정이나 절차가 얼마나 투명하고 공명정대한지 물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 될 겁니다. 모든 것이 최고지도자의 마음에 달렸으니까요.

유치원에서 선뜻 구두를 벗는 지도자. 권위와 특권의식을 내려놓고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지도자. 첫눈처럼 깨끗한 어린이들의 눈에 자주 비쳐야 할 지도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