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로라 스케트장과 통치 비자금'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백발을 뒤로 가지런히 빗어 넘긴 할머니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연신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평양의 한 로라 스케트장(롤러 스케이트장)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세차게 밀며 로라 스케트를 타는 손녀의 당찬 모습에 대견해했습니다.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손녀는 스케트장을 돌다가 지칠 만하면 이따금 할머니에게 와 품에 안기며 재잘댔습니다. 더 말할 나위 없는 정다운 가족 풍경이었습니다. 이런 광경은 평양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들에 의해 외부세계에 전해집니다. 때론 북한 당국이 대외 선전용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런 모습은 체제와 이념을 떠나 모든 사람이 꿈꾸는, 평범한 행복의 샘입니다. 저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친구들과 서울의 동대문 스케트장에 가서 스케트를 탄 적이 있습니다. 얼음바닥을 세차게 지치면서 스케트를 타다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친구들과 뒤엉키기도 하면서 우정을 키웠습니다.
배가 출출해지자 스케트를 신은 채 장내에 구름다리처럼 마련된 식당에 올라가 계란을 덮은 볶음밥(오므라이스)을 먹었습니다. 이 맛은 40여 년이 훌쩍 지나도 잊을 수 없어 지금도 식당에 가면 이 볶음밥을 즐겨 사 먹습니다. 맛도 맛이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날의 행복했던 시간 때문이 아닐까요? 운동을 통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어떤 이해관계나 다른 걱정거리가 끼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지시에 따라 평양을 비롯해 원산, 신의주, 남포, 함흥 등 주요 도시에 로라 스케트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로라 스케트장을 속속 개장하는 것은 운동을 통해 주민들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바람대로 되지 않는 듯합니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대다수 북한 주민들에겐 새 단장한 로라 스케트장이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로라 스케트를 사려면 35달러 정도를 주어야 합니다. 간부들은 자녀들에게 줄 로라 스케트를 중국에서 들여온다고 합니다. 한 켤레에 150-200위안짜리를 턱턱 잘도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 주민에겐 큰돈이지요. 목돈이 없는데도 로라 스케트를 타려는 아이가 있으면 하는 수 없이 1회 대여료로 북한 돈 3천 원 정도를 내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야 합니다. 물론 북한주민에겐 이 대여료도 없어도 되는 푼돈이 절대 아닙니다.
자녀가 기죽지 않도록 힘겹게 돈을 마련해 로라 스케트를 태워주는 부모는 가슴이 답답해질 겁니다. 돈이 많으면 멋진 로라 스케트를 사주고 맘껏 놀도록 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형편이 야속해질 겁니다. 그래도 이런 가족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운동도 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겠다며 로라 스케트장을 가게 해 달라는 자녀의 간곡한 요구를 단박에 내치는, 그럴 수밖에 없는 부모도 있습니다. 자녀 눈에는 아주 모진 부모로 비칩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때를 써도 단 한 번 로라 스케트장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 부모입니다. 사실은 허락할 수 없는 부모입니다. 하루 하루 살기 버거워 자녀의 ‘기 살리기’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부모입니다. 이런 부모에겐 로라 스케트장이 상대적 박탈감만 증폭시킵니다. 그런데 북한의 부모 대다수가 바로 이런 부모란 점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주민의 행복을 북돋워야 할 로라 스케트장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녀의 기를 꺾고 있지 않은지 염려됩니다. 로라 스케트를 살 수 없는 주민에겐 스케트장에서 아주 싼 값에 대여해 줘 이들이 어려움 없이 스케트를 즐기도록 할 순 없을까요? 틈만 나면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 격차가 심하다고 비판하고 북한 사회는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정도 지원은 해야 마땅한 게 아닌가요? 간부 자녀는 스케트장에서 씽씽 잘나가고, 보통 주민의 자녀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누구의 건강을 위한 스케트장이고, 누구의 행복을 위한 스케트장입니까?
민심을 얻으면 체제는 자연히 안정되게 마련입니다. 로라 스케트장 개장도 궁극적으로 김정은 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한다는 판단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간부 자녀만을 위한, 돈 많은 주민들만을 위한 로라 스케트장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스케트장이 없었을 때보다 주민 간 이질감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물론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습니다. 천문학적인 규모로 알려진 김정은의 통치 비자금 중 쥐꼬리만큼만이라도 풀어, 로라 스케트 대여료를 충당하면 수많은 주민이 진정으로 김정은의 처사에 고마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