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부르는 잇단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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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분석해 보는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보도되고 있는 '북한의 잇단 무리수'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북한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15일부터 기존의 표준시를 30분 늦추겠다고 밝히고 이를 ‘평양시간’으로 명명했습니다. 수십 년간 서울과 동일하게 사용해 온 표준시를 언질도 없이 바꾼다고 했습니다. 스위스에 있는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에도 이를 통보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평양시간 설정은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정권의 주체성을 선전하려는 속셈에서 나왔다는 게 중론입니다. 장용석 서울대 선임연구원은 “주체와 국가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민족주의를 불 지펴 내부결속을 다지려는 것이란 해석에 전문가들은 대체로 공감했습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한 걸음 더 나가 이를 “국수주의적 영합”이라고 공격했습니다.

평양시간은 북한이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지출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불편과 불필요한 비용을 야기한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남한 정부는 개성공단 출입 등 당장 남북 교류에 지장이 초래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남북 동질성 회복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은 먼 걱정입니다. 북한은 외부와의 교류가 적어 국제사회가 겪을 부작용이 공포 수준은 아니겠지만, 김정은의 일방적인 결정은 국제사회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인터넷 사회연결망에는 북한이 표준시를 30분 뒤로 돌린 데 대해 “30분이 아닌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선택”이라는 독설을 포함해 다양한 혹평이 수두룩했습니다. 국제전기통신연합의 설명대로 표준시 설정은 “강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북한의 태도는 미국 헤리티지재단 브루스 클링너 선임연구원의 지적대로 “국제사회의 또 다른 비웃음거리”가 됐습니다. 국제사회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도 당국의 처사를 꼬집었습니다. 외국에 나와 있는 한 주민은 “즉흥적인 지시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평양시간 설정에서 드러난 김정은의 일방통행식 행태는 남한의 이희호 여사 방북 때도 한결같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초청해놓고 93세의 노구를 이끌고 온 손님을 직접 맞지 않았습니다. 30대 초반인 김정은은 할머니뻘인 이 여사에 저 아래 하수인을 내보내 접대하게 하고는 코빼기도 안 보였습니다.

도대체 김정은은 왜 먼 걸음 한 이 여사를 만나길 꺼렸을까요?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라는 정치적 계산을 했을 거란 분석이 있습니다. 남한정부의 공식 메시지를 가져온 것도 아니고 현 정치 실세들을 대동한 것도 아닌 마당에 굳이 나서봐야 얻을 게 없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면담을 해도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또한, 애당초 이 여사를 만날 의지가 없었고 이번 초청으로 인해 남남갈등을 노렸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실제 이번 방북과 관련 남한의 여당은 북한의 처사와 방북단의 준비 미흡을 함께 지적했고, 야당은 남한 정부가 이번 방북에 소극적이었다고 맞받았습니다. 여야 갈등에 일부 국민까지 가세하면서 잠시나마 남남갈등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우상화 작업에 마음이 바쁜 김정은이 6.15정신으로 무장한 이 여사를 개인적으로 만나봐야 득 될 게 없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남북통일, 이산가족 상봉 등을 골자로 한 6.15선언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도출됐습니다. 김정은으로선 선대의 합의에 얽매이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와의 만남은 6.15 정신을 재확인하는 상징성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속사정과 정치적 계산을 이해한다 해도 김정은이 이번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민간인 신분인 이희호 여사와 기꺼이 만나 적극적으로 남한, 미국과의 대화 의지를 보였다면 경색 국면을 완화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북한은 대화 움직임은 고사하고 비무장지대에 지뢰를 매설해 남한 군인들을 부상 입혔고 예상대로 남북관계는 더 험악해졌습니다.

‘평양시간’ 발표로 국제사회를 당혹스럽게 하고 손님 이희호 여사를 만나지 않아 빈축을 사더니, 그것도 모자랐는지 지뢰공격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잇단 무리수로 북한은 ‘고립의 성’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