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분석해 보는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보도되고 있는 '확성기에서 핵무기까지'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북한의 지뢰도발로 촉발된 남북간 초긴장 상태가 고위급 협상 타결로 일단락됐습니다. 북한이 준전시체제를 선포하고 무력시위를 해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지만, ‘무박 4일 43시간’의 마라톤 협상이 극적으로 공동합의문을 생산하면서 남북관계의 향방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평균연령 64세의 양측 대표들이 판문점 협상장에서 쪽잠과 컵라면으로 이어간 피 말리는 협상에서 도출한 합의라 더욱 주목됩니다.
미국 외교협회의 스캇 스나이더 선임연구원은 합의에 대해 “한반도 안정 유지에 충분”하다고 너그러운 평가를 했습니다. 미국 매체 크리스천사이언스는 북한이 지뢰도발에 유감을 표명한 데 대해 긍정적 반응을 나타냈고,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회담은 “남한의 승리”라고 진단했습니다.
이번 협상은 그 과정을 남북 지도자가 CCTV를 통해 파악한 점을 들어 ‘간접 정상회담’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양국 정상이 협상과정을 지켜보고 공동합의문을 승인한 만큼 적절한 시점에 직접 정상회담 가능성도 조심스레 제기되자, 남한 청와대는 “남북관계의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첫 발을 뗀 것”일뿐 “지금 얘기할 단계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합의문에 명시된 대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교류 활성화를 위해 양측의 회담이 필요하고 그 급이 순차적으로 격상되면서 고위급 회담이 열리면 정상회담 논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을 겁니다. 정상회담은 “통일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면 할 수 있다”는 홍용표 통일부장관의 발언에서 ‘실낱 기대’가 감지됩니다.
사실 남북관계의 최대현안은 북핵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서 비롯된 남한의 5.24대북제재 조치와 한미 합동군사훈련도 북한이 성토해 온 단골메뉴지만 이번 협상에선 빠졌습니다. 이 사안들은 하루 이틀 새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남북한만의 결정으로 타결될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언급조차 안 됐다는 것은 남북 양측이 당장 실현 가능한 사안만 논의해 가시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비장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번 협상의 쟁점은 바로 북한의 지뢰도발 사과와 남한의 확성기 방송 중단이었습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장용석 선임연구원의 지적대로 확성기 중단은 “김정은에게 가장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북한매체가 협상 소식을 전하면서 남한을 ‘남조선’ 대신 ‘대한민국’이라고 칭한 데서도, 협상을 통해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났습니다. 남측엔 ‘전면전 불사’ 운운하면서도 평양의 외국 공관들에는 철수 권고 등 안전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전쟁할 생각이 없었음을 시사합니다.
남한도 절실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한 국민이 북한의 잇단 도발에 분개하기 때문입니다. 남한 정부는 ‘유감’이 ‘사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유감’이라는 표현에 만족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 양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미국 터프츠대학 이성윤 교수는 이번 합의가 “남한이 북한보다 더 상대의 정치적 협력을 필요로 했다”고 진단했습니다. 남한 연세대학 존 델러리 교수는 “유감 발언은 사과로 볼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지뢰 사과’와 ‘확성기 방송중단’으로 시동을 건 남북협상은 남북당국 회담을 비롯한 다양한 교류 활성화를 담은 공동합의문을 낳았습니다. 북한으로선 15일 만에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켰고 ‘사과’ 대신 ‘유감’ 정도로 합의를 이끌어냈으니 그다지 속상할 게 없을 겁니다. 그러니 합의문에 대한 북한의 충실한 이행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오는 게 무리는 아닙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달라지듯이 원하는 바를 이룬 북한은 이제 아쉬울 것도 급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을 것이란 지적입니다.
북한 측 수석대표로 협상에 참여한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돌아간 뒤 조선중앙TV에 등장해 협상 타결 내용을 밝히면서 한 말이 북한의 속내를 잘 드러냅니다. 황병서는 “이번 접촉을 통해 남조선 당국은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어가지고…상대 측을 자극하는 행동을 벌이는 경우…군사적 충돌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찾게 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발언을 했습니다. 어렵사리 합의문에 명시한 ‘지뢰 폭발 유감’ 문구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도발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아닌지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협상타결 이후 피력한 ‘북핵 회담 재개’ 희망은 고사하고, 남북간 건설적인 교류 활성화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