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전망대] 충성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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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충성서약'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온 국민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고 가정해 봅니다.

첫 번째 지시는 고기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인민 여러분, 하루 세끼 모두 고기를 먹으면 건강에 나쁩니다. 고기를 지나치게 좋아해 참을 수 없다면 채소를 많이 곁들여 먹도록 합시다. 그래야 건강이 유지됩니다.”

이 지시에 대해 주민들은 드러내놓고 말은 못해도 속으론 이럴 겁니다. “석쇠에 지글지글 구운 고기는커녕 국에 들어간 고기 한 점 구경한 기억조차 가물가물 한데 하루 세끼 고기 타령인가? 자기가 고기를 많이 먹어 뒤룩뒤룩 살이 쪄 다들 그렇게 먹고 사는 줄 아나?”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어느 주부는 냄비에서 끓고 있는 멀건 국물을 보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지도자를 이렇게 비아냥거렸을 겁니다.

김정은이 두 번째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번엔 쌀밥에 대한 지시입니다. “친애하는 인민 여러분, 하루 세끼 꼬박 쌀밥을 먹으면 나이 들어 당뇨병과 같은 치명적인 성인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잡곡을 많이 섞어 먹도록 합시다.”

주민들은 이 지시에 복창이 터진다고 할 겁니다. “쌀밥을 하루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도 충분히 먹지 못해 강냉이로 배를 채우고 있는데 무슨 허황한 소린가?” 건설작업장에 동원된 한 주민은 김정은의 지시를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며 투덜대다 분을 삭이지 못해 손에 쥔 삽으로 땅을 내리칠 겁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토록 강조하던 ‘이밥(쌀밥)에 고깃국’ 얘기는 이미 김빠진 정치적 수사로 판명 났습니다. 그러니 김정은이 위와 같은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면 천하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김정은이 최근 인민군 장교에게 충성서약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가상 지시가 아닙니다. 한국정부 당국자가 지시내용의 진위를 언론에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 당국자는, 북한군 총정치국이 소위 이상 모든 인민군 장교에게 ‘최고지도자 (김정은) 동지를 배신하지 않고 어떠한 배반행위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라는 내용의 서약서에 날인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앞의 두 지시는 사실이 아니지만, 충성서약 지시는 사실입니다. 고기 과잉섭취를 자제하고 혼식을 강조한 가상의 지시와 달리 ‘충성서약’ 지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지시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웃음거리란 점입니다. 기분 좋은 호탕한 웃음을 자아내는 게 아니라, 쓴웃음을 금지 못 하게 한다는 겁니다. 앞의 두 지시는 말할 것도 없고, 장교들에 대한 충성서약 강요도 실소가 터져 나오게 합니다.

군인은 애초부터 나라와 군 최고통수권자에 충성을 맹세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군대에서 뿌리를 내리려는 장교들에 충성서약 날인을 강요하는 것은, 투혼을 불태우며 맹훈련하는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에게 ‘축구선수로서 소임을 다할 것을 서약 날인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지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결국 인민군 장교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정은의 장교 충성서약 지시는 군대의 불만세력에 대한 우려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군대의 근간인 장교 모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일부 반대세력이 있었다면 과거에 그랬듯이 체포해 수용소에 보내거나 처형하고 말았을 겁니다. 군대에 충성서약 지시를 내려 보낸 것은 몇 명을 색출해 제거해서 될 일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리영호 총참모장 제거 후 군부 내에 불만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퍼져 있음을 방증합니다. 충성서약 지시는 최고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군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염려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군부 실세를 숙청하고 군부의 오랜 기득권을 단숨에 빼앗는 일이 쉽지 않은가 봅니다.

김정은은 겉으론 여유만만해 보입니다. 호수에 떠 있는 오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물밑으로는 군심 잡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물속의 오리발이 바삐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