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등급의 인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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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세 등급의 인도주의'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왕국에 솔로몬 왕이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왕으로 알려진 솔로몬이 하루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두 여인이 간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애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으면 유전자 검사를 통해 간단하게 진짜 엄마를 찾아낼 수 있지만, 당시로선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고민 끝에 솔로몬은 이 아기를 절반으로 잘라 두 여인에게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순간 한 여인이 울면서 아기를 다른 여인에게 주라고 애원했습니다. 아기를 갖지 못하더라도 죽여선 안 된다며 울부짖었습니다. 가짜인 다른 여인은 무덤덤하게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섬뜩한 행동은 아기를 포기하더라도 해쳐선 안 된다는 모정을 자극했고, 결국 진짜 엄마를 가려냈습니다. 가짜 엄마에겐 애초 아기의 인권이나 생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득만을 취하려 한 가짜 엄마가 세상의 지탄거리가 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북한은 지금 케네스 배, 매튜 토드, 제프리 파울 씨 등 미국인 세 명을 억류한 채 이들을 볼모로 흥정하려 합니다. 며칠 전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를 주선해 이들의 입으로 석방을 도와달라고 미국정부에 호소하도록 했습니다. 북한은 겉으론 인도주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내는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미국의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지낸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는 미국 라디오방송 NPR에 나와 북한의 꿍꿍이 속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인도주의라는 푯말 아래 치졸한 흥정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의 속셈이 무엇이든 억류 미국인 석방과 관련해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입니다. 이는 인도주의의 진정성을 잣대로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1등급 인도주의’ 방안은 억류 미국인들의 인권만을 생각해 이들이 아무 조건 없이 즉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지혜로 아기가 진짜 엄마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말입니다. 북한이 이런 조치를 취한다면 국제사회는 북한을 새롭게 볼 겁니다. 그리고 북한이 앞으로 북한주민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이처럼 대승적으로 행동할 때 ‘인권 탄압국가’란 딱지도 서서히 벗을 겁니다.

차선책으로 ‘2등급 인도주의’ 방안이 있습니다. 북한이 어느 선에서 만족하고 억류 미국인들을 석방하는 겁니다. 북한은 수 개월 전 케네스 배씨 석방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를 초청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초청을 취소해 배씨와 그 가족,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이러한 돌발행동은 북한이 킹 특사보다 지명도가 높은 인사의 방북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낳았습니다. 억류 미국인 석방을 생색내기용 쇼 정도로 활용하려 했다는 겁니다. 당연히 북한의 처사는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북한은 ‘2등급 인도주의’ 방안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이 방안은 명분과 실리를 겸한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킹 특사는 미국 국무부의 북한인권 실무책임자란 점에서 억류 미국인 문제를 직접 풀어나가는 데 적임자입니다. 킹 특사를 다시 불러 미국인들을 함께 돌려보내면 인권책임자와 머리를 맞대 인권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모양새가 좋습니다. 실제 2011년 북한은 킹 특사를 초청해 한국계 미국인 에디 전씨를 억류 6개월만에 석방한 사례도 있습니다. 아울러 지난번 돌연한 킹 특사 초청 취소에 대한 간접적 사과의 의미도 지니므로 국제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이 가장 선호하는 ‘3등급 인도주의’ 방안이 있습니다. 전직 미국 대통령과 같이 세상의 이목을 끌어 모을 만한 인사의 방북을 말합니다. 이 방안이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2009년 한국계 유나 리, 중국계 로라 링 두 미국 여기자의 석방에 산파역할을 했고, 2010년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인 아이잘론 곰즈씨를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이번에도 북한의 요구에 걸 맞는 인사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세계 언론은 대서특필할 테고 북한은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됐다고 해서 북한이 인도주의를 발휘했다며 찬사를 보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상식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인도주의의 가면’ 뒤에 가려진 북한 정권의 얄팍한 꼼수에 분노할 겁니다.

북한은 세 등급 인도주의 방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겁니다. 조건 없는 즉각 석방인 ‘1등급 인도주의’ 방안은 국제사회가 바라는 바지만, 북한에게 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전직 대통령 급 인사를 통한 석방인 ‘3등급 인도주의’ 방안은 북한이 선호하는 것이고 실현 가능성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북한이 인권유린 국가란 오명을 벗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인질범에게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인질을 풀어내 온 격이니 말입니다. 결국, 방북 인사의 급을 조금 낮추는 ‘2등급 인도주의’ 방안이 북한의 국익에도 유익한 현실적 대안이 아닐까 합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