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의 ‘또 다른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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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개성공단의 또 다른 선물'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20여년 전 통일 독일의 한 도시에 있는 대형서점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매장의 한가운데 인기서적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그 중에 다른 책들에 비해 크기가 작고 두께가 아주 얇은 책이 있었습니다. 지금 정확한 책 제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오씨(ossi)-베씨(wessi)’란 단어가 들어 있었습니다.

‘오씨’는 통일 직후 독일 사람들이 구 동독 사람을 부르던 말이고, ‘베씨’는 구 서독 사람을 일컫던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 단어에는 냉소와 비아냥이 묻어 있었습니다.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들을 ‘오씨’라고 부르면서 자신들보다 한 단계 낮은 계층으로 여겼습니다. 이에 맞서 동독 사람들은 서독 사람들을 베씨라고 부르며, 잘산다고 거들먹거린다고 꼬집었습니다.

독일 통일 후 양측의 이런 갈등이 지속되다가,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이 2005년 총리에 당선되면서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 전 이미 수십 년간 꾸준히 인적 물적 교류를 했던 동서 독일 사람들 간에도 이런 앙금이 있었으니, 60여 년간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온 남북한 사람들 간 앙금의 질량은 당연히 무겁겠지요.

그런데, 남북한 사람들이 묵은 감정을 털어내기가 쉽지 않겠지만, 유난히 정이 많고 화통한 민족이란 점이 의외의 물꼬를 터줄 수도 있습니다. 가동 잠정 중단으로 물적 피해와 심적 고통을 안겨준 개성공단 파행이 다시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가능성이 엿보였습니다.

개성공단 입주 남한 기업들은 해마다 추석을 앞두고 북한 근로자들에게 떡, 기름, 초코파이 등을 선물로 주었는데, 올핸 대다수 기업이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기업대표들은 “북한 때문에 공단이 폐쇄돼 큰 재산손실을 보았는데 무슨 추석 선물이냐?” 라며 눈을 부라리는 대신, 어려운 북한 근로자들에게 선물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남한에서는 평소에 제대로 선물을 지급하지 못한 기업도 추석 명절에는 어떻게든 근로자들에게 고향의 가족들에게 들고 갈 선물꾸러미를 안겨주려고 하니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북한 근로자들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회사가 가동중단으로 어려운데 어떻게 하겠느냐?” 라며 이해했습니다. 북한 근로자는 “수개월 동안 일자리를 잃어 봉급을 못 받았는데 추석 선물도 안 챙겨주나” 라며 투덜대지 않았습니다. 지난 수년간 북한의 잇따른 도발로 남한이 지원을 중단하자 원색적인 공격을 퍼부은 김정은 정권과 달리, 남한 기업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피해자로 여긴 듯했습니다.

수개월간 가동중단으로 남한 기업이나 북한 근로자들이 피해를 보았으니 서로 불편한 심사를 숨기기 어려웠을 텐데, 남한 기업대표들과 북한 근로자들이 다시 만난 공장은 ‘이해로 충만한 일터’가 됐습니다. 진흙탕에 빠진 수레를 끌어올리려고 형이 앞에서 당기고 동생이 뒤에서 미는 모습처럼 훈훈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서처럼 뜨거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남한 기업대표들과 북한 근로자들의 가슴 속에는 서로를 보듬고 돌보며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뜨거운 ‘공감의 눈물’이 흘렀을 겁니다.

개성공단의 남한 기업과 북한 근로자들이 화기애애하게 지내면 공단의 장래는 밝습니다. 개성공단의 밝은 미래는 희망찬 한반도의 밑거름입니다.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남한 기업과 북한 근로자의 교감은 남북한 7천만 주민의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출출할 때 하나씩 빼먹는 곶감처럼, 북한당국이 개성공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구태만 버리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런 교감, 공감이 호두 껍데기처럼 단단하게 둘러싸인 평양 심장부에도 닿았으면 합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