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중산층 지하교인'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우리 몸의 중간에 온갖 장기를 품은 몸통이 있듯이 사회에도 중간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주위를 긴장시키는 권력층은 아니지만, 나라의 중대사에 관심을 갖고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기마다 나보란 듯 호화여행을 다니지는 못하지만, 땀 흘려 일한 뒤 가족과 오순도순 소박한 꿀맛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두에 서서 잘난 채 하지도 않고 대열 뒤에서 별생각 없이 끌려 다니지도 않지만, 필요할 때마다 공동체에 대한 충정으로 바른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유세계에서는 이들을 중산층이라고 부릅니다. 나라의 지도자는 중산층의 지지를 간절히 구합니다. 중산층이 외면한 지도자는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중산층의 마음을 잡는 게 지도자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으뜸가는 과제입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얼마 전 워싱턴에 있는 링컨기념관에서 연설을 통해 가능한 많은 미국민이 중산층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이나 대선후보들이 가장 애용한 단어가 중산층입니다. 자신이 중산층을 위한 지도자가 되겠다며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도 중산층을 늘리는 정책을 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중산층이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란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고도성장을 이룬 사회에선 빈부의 차이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처방으로 중산층 확대가 중요한 화두가 돼왔습니다.
중산층은 나라마다 기준이 다양하고 규모도 다르지만, 대체로 국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중산층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적절한 여가 생활을 즐기며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경제성장 외엔 안중에 없어 보이는 중국은 2030년, 그러니까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40대 후반의 나이에 중산층이 14억 명에 이를 것이란 유엔보고서가 있습니다. 지금 북한 인구의 50배가 넘는 사람이 중국의 중산층이 될 것이란 전망이지요.
중산층은 건강한 사회의 필수 구성요소입니다. 중산층은 병든 닭처럼 무기력한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런데 대다수 북한 주민에게 중산층이란 단어는 낯설 겁니다. 자유보다 속박에 익숙한 사회, 자율보단 규제가 규범인 사회, 창의보단 지시가 일상인 사회, 그리고 주민의 노력 결실을 소수 권력층이 독식하고 주민 대다수는 허덕대는 사회, 바로 그런 북한 사회에선 중산층이란 단어가 외국어처럼 들릴 겁니다.
특히 북한의 종교와 중산층은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보입니다. 보통 종교는 중산층보다는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을 주기 마련이라, 중산층이 별로 없고 대다수 주민이 빈곤층인 북한에선 중산층 신앙인을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북한은 과거 로마 제정시대처럼 주민의 신앙생활을 탄압합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소식이 들립니다. 북한 지하교인 중 상당수가 중산층이라는 겁니다. 물론 북한 지하교인이 몇 명이며 이 가운데 중산층 교인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되진 않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한 기독교 선교단체가 최근 북한 지하교인들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이들이 최고위층은 아니지만, 이동이 자유로운 중산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가난한 지하교인도 있지만, 외국과 무역을 통해 외화를 버는 무역일꾼 같은 중산층이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많아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리기 전에 김일성, 김정일 배지를 빼놓거나 벽에 걸린 사진을 떼어 바닥에 놓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중산층 규모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중간 관료, 경제적으로는 무역일꾼이나 돈을 모은 상인들 정도가 중산층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형태를 띠지 못했습니다. 북한 지도자가 중산층을 확대하기 위해 정책을 편다는 말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에도 중산층이 늘어 무시 못할 몸통이 될 날이 올 겁니다. 북한의 중산층이 지하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는 미래의 북한사회에서 중산층의 역할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깜깜한 방에서 ‘신앙의 자유’를 갈구하는 중산층 지하교인의 기도가 언젠가 경제 자율과 민주화를 위한 중산층 상인과 중산층 관료들의 기원으로 이어질 겁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